▲ 신석구 목사 ⓒ(사진제공: 연합뉴스)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지난 일은 한낱 춘몽 같고/ 남은 날은 지는 석양 같구나/ 일편단심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를 위해 미친 듯이 사는 것뿐이라.”

3년여 전, 신석구(1875~1950) 목사를 추모하는 칸타타(악극 형식의 교회 음악)가 연주됐다. 이는 실존했던 한국인을 다룬 교회용 칸타타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신석구 목사의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며, 그의 발자취를 기억하려는 사람이 많음을 보여준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
신석구 목사는 종교인으로서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황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단행했다.

일본의 이 같은 강압적인 정책에 굴복해 1938년 2월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컸던 장로교 평북노회를 시작으로, 9월 장로교 총회가 전국 23노회 중 17노회의 찬성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뿐 아니라 같은 달 신 목사가 입교했던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하지만 신 목사는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국민들뿐 아니라 기독교 교단들도 대체로 신사참배를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를 비롯한 몇몇만이 오롯이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같은 시기의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신 목사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 했던 그는 결국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2개월간 온갖 악형을 겪어야 했고, 이로 인해 중병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 같은 뜻을 굽히지 않고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에도 신 목사는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다 또 투옥되기도 했다.

◆종교로 국민의식 일깨우고자
신석구 목사는 종교로써 국민들을 깨우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큰 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적 가르침이 국민의 의식을 깨우고, 국민의식이 깨어나야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그는 1908년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경성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공부했다. 이후 주일학교 교사, 전도사, 감리교 강원도 홍천․경기도 가평구역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는 전도활동뿐 아니라 계몽운동을 동시에 전개하며 종교로 국민을 일깨우겠다던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해갔다. 이후 수표교 교회 목사로서도 활동했다.

◆3.1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그는 또한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인물이다. 1919년 2월, 같은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의 3.1운동 추진계획 참여를 권유받게 되면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민족 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같은 해 3월 1일 다른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로 인해 그는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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