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바라보다-①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바라보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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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암문(사진제공: 신형기 소장)

[글마루=이지수기자]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 남한산성은 수많은 외세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나라를 지켰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품은 가슴 시린 역사의 현장이지만 모진 굴욕과 핍박을 이기고 이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라를 지킨 든든한 성벽

남한산성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오랜 시대에 걸쳐 한강 유역 및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조선의 제16대 왕, 재위 1623~1649)가 피신해 항전하다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졌다. 축조한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을 다시 축조하기로 했다.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성이었다.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이 성 안에 자리했다.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다. 아무리 사료를 뒤져도 함락됐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인조도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껴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항복문서에 넣었다. 실제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남한산성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는 곳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해 수어장대, 지수당, 연무관 등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뿐만 아니라 숙종과 영조, 철종이 임시 거처로 삼았고 고종도 여주와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렀던 곳이다.

‘행궁’은 현재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사무실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1963년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과 달리 행궁은 2007년 국가 사적 제480호로 지정됐다. 이는 1907년 8월 1일 행궁이 병참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폭파해버렸기 때문. 현재 행궁은 폭파 전 사진을 토대로 복원 중이다. 특히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 외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뤄져 있다.

‘청량당’은 성을 쌓은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져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을 세웠다.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자동차를 타고 남한산성을 올라가다 보면 좌측 편 울창한 숲 속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이곳을 ‘지수당’이라 한다.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이곳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며 정자 옆 연못은 ‘ㄷ’ 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산성 내에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 연무관, 백제 온조왕과 산성 축성 책임자였던 이서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숭렬전 등 소중한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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