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공스님 ⓒ(사진제공: 수덕사)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경허스님이 만공스님(滿空 月面, 1871~1946)과 함께 시주를 받고 절로 돌아가고 있던 때였다. 오래 걷기도 했고, 시주 자루가 무거웠던 탓에 만공스님이 “스님, 다리도 아프고 자루가 무거워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허스님은 갑자기 밭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 한 명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낙네의 남편이 화가 나 소리 지르며 죽일 듯이 쫓아왔고, 이를 피해 두 스님은 힘껏 산으로 도망쳤다.

이후 만공스님이 왜 그러했는지를 묻자 경허스님은 “다 자네 때문이었네. 놀라서 도망치는 바람에 힘든 것도 모르고 오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만공스님에 얽힌 일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 안에는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같은 경허스님의 가르침에서 만공스님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가르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처음에는 더 이상 못 가겠다던 그가 위기 상황에 처하자 산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제, 조선불교에 간섭 말라”
만공스님은 일제강점기 조선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힘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총독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겠다는 방침에 그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당시 조선은 유교사회이긴 했으나 불교의 뿌리가 이어져오면서 조선인들의 정신문화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불교를 말살하려 했고, 조선총독은 ‘조선 불교 대본산 주지회의’를 주재하며 조선불교가 진흥하기 위해선 일본불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님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총독을 꾸짖으며 “조선불교가 진흥하는 길은 오직 조선 승려들이 더욱 열심히 수행하는 것밖에 없다. 더 이상 총독부는 조선 불교에 간섭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또한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하며, 조선불교의 전통성과 종교적 순수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31본산 주지 중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선(禪)불교 진흥 위해 힘써
만공스님은 열세 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금산사에 갔다 처음 만난 불상과 스님에 깊은 감명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그 후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처음엔 그곳 진암스님 밑에서 수련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곳에 들른 경허스님을 만났고, 경허스님의 설법을 듣고 난 후 그를 따라갔다.

경허스님을 따라가 심부름을 하며 생활하던 중 어느 날 한 승려가 그에게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스님은 이 화두를 들고 열심히 참구했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진하다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더욱 수행에 힘썼다.

그러던 중 화엄경 제1게송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를 읊다가 깨달음을 얻어, 이후 불자들에게 이 같은 가르침을 전했다. 그가 강조했던 법어 중 하나가 ‘세계일화(世界一花, 우주는 한 송이 꽃)’였다.

그는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며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그의 제자로는 보월ㆍ금봉ㆍ혜암ㆍ원당스님을 비롯해 만성ㆍ일엽 등의 비구니 스님들이 배출됐다. 생의 마지막을 덕숭산 정상에 인접한 전월사에서 보내던 스님은 1946년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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