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한반도중립화 연구소장

고종은 일본, 미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영세중립 실현에 협력을 받지 못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다. 고종은 1903년 9월 현영운(玄映運) 특사를 일본에 보내 한국의 영세중립 실현을 일본정부에 다시 요청케 했으나 일본의 협력을 받지 못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의 영세중립 요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국의 협력을 받는 데 실패한 고종은 1904년 1월 20일 한국의 영세중립국임을 일방적으로 만방에 선포했다. 고종이 일방적으로 영세중립을 선포한 이유는 한국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고종은 한국의 영세중립국임을 선포한 후 각국정부에 이를 통보하는 한편 외국의 모든 군대는 한국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은 독일, 러시아, 프랑스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러-일전쟁이 1904년 2월 10일 한국에서 발발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이 실패한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한국 위정자들의 외래 지향적 국민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한국의 국방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친중파,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이범진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 등이 집권을 위한 대립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었다.

둘째, 한국의 군사력이 너무 미약하였다. 당시 한국의 군사력은 1882년 7월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구 군대가 대립함으로써 군사력이 약화되었으며, 1894년 6월 단행된 갑오개혁(甲午改革)에 반대한 동학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데 정부군도 피해를 입었다.

셋째, 일본의 한국지배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 후 탈아론(脫亞論)을 지향하면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이고 다가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됨에 따라 국가정책으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끝으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한국문제에 대한 엄정한 중립정책이었다.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1901년 9월 6일 암살된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제26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인식은 “한국은 극동에서 강대국에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동북아의 평화를 저해(沮害)하는 국가이므로 어느 국가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그의 편견 때문에 루스벨트는 한국주재 미국공사관 직원들에게 일체 개입하지 말고, 한국정부의 요구에도 응하지 말고 엄정중립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이 왜 한국에 필요한가를 설명하는 당시 외국인의 견해를 살펴보자. 1883년부터 3년간 조선에서 관세업무 보좌역으로 근무한바 있는 영국 왕립아시아협회 회원인 던캔(Chesney Duncan)은 1889년 8월 발행한 그의 저서 ‘한국과 4대강국’에서 “한국에서 엄정한 중립(strict neutrality) 정책이 유지되지 않고서는 한국의 실제적 평화(substantial peace)나 참다운 번영(real prosperity)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00여 년 전에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은 비록 실패했으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4강국가의 국가이익이 오늘날에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동북아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남북통일과 통일된 한국의 미래 비전에 대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고종의 정책이 아직도 유효한 것임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2001년 1월 하와이 대학교에서 개최된 남한·북한·일본 역사학자들 간의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회의에서 고종이 일본정부에 제출한 영세중립 정책의 사본을 근거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주장한바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생존 시 그의 저작집에서 중립통일을 27회, 중립화를 3회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이 아직도 유효함을 입증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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