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人權)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인권존중과 보호의 차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인권존중의 기준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얘기다. 허나 작금의 시대를 보고 있노라면 인권에도 기준을 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씁쓸할 따름이다.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생겨난 학생인권조례를 보자니 세상 문화가 변해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변화라는 것이 좋은 쪽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만 혹여 세상 문화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비단 학생인권조례에 나타난 사항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는 많은 문제들이 세상 문화의 오염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지켜야 할 규칙들을 지키려 힘쓴다면 인권존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학교폭력의 가해자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생각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세상 말세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집단 폭행을 일삼고 친구를 괴롭히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고 외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이들에게 “미성년이기에, 아직 학생이기에”라는 말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또한 미성년의 인권존중이라는 것을 이유로 처벌이 미흡한 것도 문제라고 본다. 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소년원이든 교도소든 수감자들의 인권존중과 알권리 등으로 인해 외려 교도관 등 다른 이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형벌만이 교화와 교도의 길은 아닐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죗값은 치러야 한다.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 없다면 세상은 요지경이 될 것이다. 또한 사랑과 용서도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할 때라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값을 받는 것을 억울하다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고 변화될 기회로 삼을 때 ‘인권’은 자연스레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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