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주 초상(이한철, 188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1.5×35.0㎝)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마음을 떠보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정을 나타냈다.
고려 말, 정도전 등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기회를 엿봐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먼저 알아챈 이방원에 의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답시조를 통해 변치 않는 마음을 드러냈다. 몸이 없어지더라도 임금을 향한 충절만큼은 절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그의 시조처럼 그는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 절개를 지켰다.

답시조를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를 더 이상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해 부하를 보내 그를 죽이도록 했다. 하지만 13년이 흐른 후 그에게 영의정이라는 벼슬과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시기였기 때문에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도 인정했던 그의 충절은, 후대에 이색․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추앙받으며 의리․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절개의 정신 서린 ‘선죽교’
정몽주는 한국사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고려 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몽주는 나라가 기울어져 감을 보면서도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의 이 같은 태도는 성리학의 핵심 가르침인 충과 효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 길이 비록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호의호식하며 잘살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는 그 길을 마다하고 선비의 뜻을 지켰다.

또한 그의 효(孝) 정신에 대한 일화도 전해진다. 죽임 당할 것을 감지한 정몽주는 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 했다고 한다. 이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해 말을 돌려 탄 것이다.

이날 그는 개성 ‘선지교’라는 다리를 지나다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 의해 암살돼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 피가 흐른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올랐는데 이런 연유로 그 다리를 ‘선죽교’라 부른다. 대나무는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 비록 그의 몸은 죽었지만, 그 충절만큼은 꺾이지 않고 다시 피어난 것이다.

◆주자학의 대가
그는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을 스승으로 뒀는데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평가하면서 ‘동방 이학(理學)의 원조’로 칭했다. 정몽주는 또한 도성에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도록 해 유학융성에 힘을 쏟았다.

◆유능한 외교실력 발휘
정몽주는 성리학자로서뿐 아니라 외교가로서도 유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가 명나라와의 외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가 나서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펼쳐 전란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두 나라 간의 잦은 분란으로 명 태조가 고려 사신을 유배까지 보내는 상황에서, 명 태조의 생일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술로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된 사신들도 귀국시켰다. 그는 일본에도 사신으로 가서 당시 극심한 사회적 문제였던 왜구의 침입을 해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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