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한반도중립화 연구소장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좌절을 경험한 고종은 국권회복과 국가의 자주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세중립(永世中立)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고종실록(高宗實錄)이나 이조실록(李朝實錄)은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에 대해 기록을 하지 않고 있어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미국 국무성의 외교문헌이나 학자들은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원래 영세중립 정책이란 강대국으로 둘려 쌓인 약소국이 자주독립과 국가의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선택하는 외교정책이다. 예를 들면, 스위스는 주변국가의 침략을 방지하고,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1815년 영세중립 정책을 채택하였고, 오스트리아는 2차세계 대전 후 4대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분할 점령과 4개국 군대를 명예롭게 철수시키기 위해 1955년 영세중립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로 인해 이들 국가들은 외국의 어떠한 침략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국가의 안보와 발전을 현재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세중립 정책의 필요성이 최초로 논의된 것은 서울주재 독일공사관 부영사인 부들러(Hermann Budler)가 1885년 3월 영세중립 정책을 한국정부에 제언한 이래, 김옥균(金玉均)과 개화파의 우정국 쿠데타 사건으로 미국에 유학중 소환되어 귀국한 유길준(兪吉濬)의 ‘조선중립론’이 1885년 6월 최초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후, 고종정부는 한국의 관세업무 보좌역 체스니 던켄(Chesney Duncan), 궁내부 고문 윌리엄 샌드(William F. Sands) 등으로부터 “한국이 중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을 방지하면서 자주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세중립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영세중립 정책의 중요성을 수차 건의 받았다. 그러나 당시 고종과 조정 대신들은 영세중립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1882년 7월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한국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1884년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5년 4월 영국의 거문도(巨門島) 점령, 1894년 6월 갑오경장(甲午更張), 그해 10월 발생한 동학혁명(東學革命),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 본격대두, 그해 10월 일본의 낭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시해,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 등으로, 한국의 운명은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먹잇감의 대상이었으며,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태로 독립국가의 유지가 우려되는 시기였다.

상기와 같은 동북아의 국제적 상황에서 한국의 자주독립 유지와 외세배격을 목표로 고종이 선택한 외교정책은 영세중립이었다. 고종은 1900년 8월 조병식(趙秉式) 특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고에이 도구마(近衛篤磨)에게 일본이 한국을 대신해서 열강국가에 한국의 영세중립 정책을 실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에이는 한국의 영세중립국 정책의 준비부족을 지적하면서 “국방은 일본에 위임하고, 한국은 내치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고종은 영세중립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1900년 10월 조병식 공사를 통해 동경주재 버크(Alfred E. Buck) 미국공사에게 미국정부가 한국의 영세중립을 위해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버크 공사는 영세중립과 같은 중요한 외교정치 문제는 한국정부가 워싱턴 주재 공사를 통해 직접 제안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접수를 거부했다. 고종은 1901년 1월 또 다시 동경주재 이스볼스키(Alexander P. Isvolski) 러시아 공사에게 한국의 영세중립에 대해 일본과 협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스볼스키 공사는 먼저 일본에 한국의 영세중립 정책을 협의했으나 일본정부로부터 한국의 영세중립을 논의할 입장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다.

고종은 주일본 조병식 공사로부터 “한국이 군대를 5만 명으로 증원할 경우 일본이 한국의 영세중립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받았다. 고종은 이 문제를 서울주재 알렌(Horace N. Allen) 미국공사에게 문의했으나, 알렌은 “조선의 세입으로는 그러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알렌은 국무성에 “한국의 영세중립 정책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함으로써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의 1차적 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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