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보유자 정철호 선생. 선생의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이 모진 세월을 말해 준다. (사진제공: 한국판소리고법보존회)

명창 임방울 선생의 제자 중 유일하게 남아
득음의 길 위해 산에서 수양도 마다치 않다
판소리 길 걷다 고수의 길로 들어 선 명고수
아쟁·아쟁산조 창작… 기악과 작곡도 통달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서사적인 이야기를 창과 아니리, 발림으로 표현하는 종합예술이다. 하지만 판소리에는 소리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판소리 고법’이다.

일반 사람들은 북을 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 ‘고수’는 흔히 알고 있다.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용어가 생소한 ‘판소리 고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내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는 유일한 정철호 선생을 서울시 홍제동 주택가 골목 초입에 위치한 ‘정철호 전수소’에서 만났다.

1996년 9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 인정받은 정철호 선생은 “나는 판소리를 말할 때 ‘일고수 이명창’을 강조한다”며 “고수 장단이 없는 소리의 맛은 진정한 맛이 아니다”고 말했다. 물론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소리도 훌륭하지만, 장단이 더해질 때 비로소 훌륭함을 넘어 완벽한 소리가 된다는 의미다. 그만큼 북장단은 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정 선생은 원래 판소리를 먼저 시작했다.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대로 기악과 소리의 명문가였다.

“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러 대대로 전통기악과 소리를 이어왔지요. 하지만 내 나이 8세에 어머니를, 13세에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고아 신세가 됐지요.”

그의 나이 13세.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귀한 인연이 그때 시작됐다.

“판소리를 했던 아버지로부터 당시 천하명창으로 손꼽히던 명창 임방울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어요.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때마침 목포에서 임방울 선생이 공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열세 살 난 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으면 먼 길을 마다않고 임방울 선생을 찾아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다행히 임방울 선생을 만나, 단원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부르셨던 ‘쑥대머리’ 대목을 불렀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목청껏 부른 이유에서일까. 임 선생은 그의 소리 실력을 칭찬하고 단원 입단을 허락했다. 그렇게 천하명창의 제자가 된 정 선생은 스승을 따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소리를 했다.

“봄과 가을에는 중국 순회공연을 주로 했어요. 당시 지낼 곳도 마땅치 않던 나는 스승의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공연이 없는 여름과 겨울에도 스승님과 함께했죠. 문득 그 시간이 그립네요.”

그를 판소리 명창으로 또 판소리 고법의 고수로 있게 한 임방울 선생은 향년 57세로 타계했다. 스승과의 추억을 회상하던 그가 목이 멘 소리로 이어 말했다.

“스승과 함께한 15년 동안은 잊을 수 없어요. 이후 더 나은 소리(득음)를 위해 산에 가서 수양도 하고 연습에 매진했어요.”

판소리를 하는 사람은 한 번 무대에 오르면 보통 5시간을 완창(판소리 한 마당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일)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득음을 하지 않고는 장시간 소리를 낼 수 없다.

“명창은 득음도 중요하지만 북도 잘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수와 호흡하며 북소리 장단을 잘 듣고 맞췄을 때의 소리는 감동 그 이상입니다.”

그는 “소리꾼이 북을 잘 쳤을 때 비로소 ‘일고수 이명창’으로 불릴 수 있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판소리 박자는 어렵기 때문에 소리꾼도 북을 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고수가 북을 잘 쳐줘야 소리하는 사람도 흥이 나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지정 고수로 활동했던 김재선 선생님은 북을 잘 쳤어요. 명고수였던 한성준 선생의 제자였죠. 스승님 옆에서 북을 치던 김 선생님을 보고 자연스럽게 북 장단도 익히게 됐어요.”

정 선생은 북 장단을 배우면서부터 기악에 더 소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렇게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아닌 판소리 고법을 하는 고수로 남게 됐다. 이후 국악기를 다루는 실력도 예사롭지 않기로 소문이 난 그는 1900년대 중반에 아쟁과 아쟁산조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 정철호 보유자가 직접 제작한 8현 아쟁으로 창작곡 아쟁 산조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한국판소리고법보존회)

정 선생은 음폭이 크고 우아한 소리를 내는 아쟁을 궁중음악이 아닌 민속음악에서도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12줄 가야금을 7현으로 만들어 음을 연구하다보니 음이 하나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며 “하나의 줄을 추가해 8현으로 만들었더니 모든 음을 맞출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직접 창극과 판소리를 위한 곡을 작곡하게 된 그는 일제 식민지 해방 이후 생겨난 여성국극단의 곡을 처음 작곡한 장본인이다. 이후 40여 년을 하루가 멀다하고 작곡만 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아쟁을 연주하거나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게 작곡한 곡만 무려 1만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인물들의 일대기를 토대로 곡을 만들었는데 권율, 장보고,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김구 등의 민족 위인들뿐만 아니라 그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며 만든 ‘인동초요’ 등을 작곡했다. 그가 작곡한 수많은 창극과 판소리는 지금도 후학들에게서 연주되고 있다.

“마지막 작품 두 개 정도를 하고 은퇴할까 생각 중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우리 가락을 위한 교육이 매우 잘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든든하지요.”

힘들었든, 행복했든, 소리와 함께 보내온 세월만큼이나 그의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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