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국내 정치인들의 관심이 온통 총선과 대선에 가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거에서 이겨 당선되는 것, 정권을 손에 쥐는 것 말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로부터 정치 싸움은 잔인함과 치열함에서 전쟁에 못지않았다. 그 같은 기본 속성에서 봉건시대의 궁중정치와 현재의 민주정치가 다르지 않다. 왜인가. 전쟁과 정치 싸움은 인간의 가장 잔인한 원초적인 본능이 발휘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국가 간에는 내 것을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때 또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론을 쓴 독일의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이며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을 소련이라는 국가 조직으로 바꾸어낸 레닌은 이 말을 뒤집어 아예 ‘정치는 다른 가면을 쓴 전쟁’이라고 했다. 전쟁에서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라면 가장 비난받아야 할 일들이 가장 정당한 것이 된다. 약탈은 전리품의 ‘획득’이며 기만은 ‘전략 전술’이고 살상과 파괴는 악이 아니라 ‘선’이다. 적에 대한 무자비함과 비정함은 박수를 받아야 할 용기다.

전쟁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감상(Sentimentality)이다. 감상은 전쟁을 패배로 몰고 간다. 레닌의 법칙에 따르면 전쟁에서 추구돼야 하는 철칙은 승리이며 승리는 전쟁에서 꼭 지켜져야 하는 종교의 계율(Commandment)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전쟁의 지상목표가 승리이기 때문에 전쟁은 잔인하고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칼 마르크스를 계승한 레닌의 교조적인 공산주의 이념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이념의 전파가 인류 역사에 많은 죄과를 남긴 것은 사실일지라도 정치와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만은 레닌은 가장 냉정하게 읽어낸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전투 현장에서 미 해병대원들이 그들이 사살한 탈레반들의 시신에 소변을 누는 몹쓸 짓을 했다. 전쟁이 아무리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비정한 것이라 해도 그 같이 죽은 시신을 모욕하는 행위를 냉정한 방관자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다. 과연 전쟁 참여자의 적에 대한 적개심은 전투가 종결된 뒤에도 평상심으로 얼른 복원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깊은 것인가. 비록 그것이 전투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중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르지만 새삼 실감하는 것은 참으로 전쟁은 잔인한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것이다.

어떻든 사람의 천성 중에서 그 같이 악한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전쟁은 제발 없어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 마음속에서 영원히 그치지 않을 싸움으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처럼 인류 역사를 관류해왔다. 우리가 경험한 60년 전의 한국전쟁은 그 같은 전쟁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전쟁의 하나로 꼽힌다. 북과 남의 이념 대립과 우리 내부의 위화감이 겹쳐 동족을 살상하는 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극악한 수단 방법들이 동원됐었다. 미 해병대원들이 소변을 누어 시신을 모욕한 것은 분명히 몹쓸 짓이지만 국내외 전쟁에서 그보다 더한 일들은 얼마든지 벌어진다. 그것이 전쟁이다.

대선과 총선을 앞둔 정국이 살벌하기가 전쟁 같다. 오로지 전쟁의 철칙이며 계율인 승리의 쟁취를 위해 세력 간에 전선이 형성되며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호응해 복지와 민생을 외쳐 국민의 귀를 즐겁게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위민(爲民)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승리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바꾸어 말하면 표를 모으기 위해 전쟁에서와 같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말은 부드럽고 꿀과 같이 달지만 뱃속에 칼을 숨기고 있는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딴 속셈을 뱃속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도 없지만 굳이 숨기지도 않는 것 같다. 어떤 쪽에서는 벌써부터 정권을 빼앗아 집권세력의 그늘에서 당한 설움을 단단히 복수하고 한미 FTA를 폐기하는 것은 물론 정책의 급제동, 급회전을 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렇게 되면 선거가 ‘센티멘털러티’가 없는 전쟁과 같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악착 같이 빼앗으려 하면 다른 한쪽에서도 악착 같이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에 싸움은 가열될 수밖에 없다. 선거가 이런 식으로 치러지면 나라 안의 갈등과 대립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역사는 순탄한 연속성을 확보하기보다 단절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정치 현장의 정치인들이 우려해줄 것을 요구한다 해도 그들 귀청에 공명을 일으켜 놓을지는 의문이다. 그들의 목에 핏줄이 불끈 솟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항아리가 깨져 못 쓰게 되건 말건 돌을 던져 쥐를 잡으려 할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곁의 그릇을 깨지 않을까 걱정하는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여유를 기대하는 것은 전쟁에서의 낭만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무리인 것 같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정치에 국민이 냉가슴을 앓고 걱정을 해도 국민은 그 같은 정치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슬픔이다. 우리 정치의 폐해는 뭐니 뭐니 해도 국민을 자신들 패거리의 ‘이념’이나 ‘주의(主義)’로 확실하게 패를 갈라 놓은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정치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종교 얘기나 마찬가지로 결국은 서로를 얼굴 붉히고 언성을 높이게 만들어 놓는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포용은 부족하며 내 편이 아닌 얘기는 가치를 떠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의 패거리 싸움이 만들어낸 화(禍)는 마치 ‘연못에 던진 보석을 찾는다고 물을 퍼냈으나 보석은 못 찾고 물이 말라 물고기만 죽게 만든 앙급지어(殃及池魚)’와 같이 애꿎게 국민에게 와 닿았다. 벌써 이념의 문제는 목숨 걸고 싸울 만한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데도 우리 정치인들 의식의 시계는 이념 대립의 시대에 멎어있다. 보수는 답답하며 진보는 불안하다. 그들은 분명히 서로 공유하고 지키며 전향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가치가 있음에도 적대적인 진영으로 갈리어 권력을 놓고 싸운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가치를 지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며 어디로 국민을 끌고 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인가. 국민은 그들의 꿈과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다. 국민이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선거가 불안한 것이다. 그들은 아는가. 세계는 탈이념의 하나이며 하나의 흐름으로 가려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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