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도교 중앙대교당 외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었을 것이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하이 임시정부가 없었을 것이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이다.

그만큼 천도교는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중심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었다.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손병희에 의해 건립이 추진된 중앙대교당은 건축미와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아 1978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인사동 한쪽 골목에 자리 잡은 중앙대교당. 현대건물들 사이에서 눈에 띌 만큼 근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천도교=민족종교’라는 인식 때문인지 한옥이나 기와집 형태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언뜻 보았을 때는 성당이나 교회건물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일제강점기에는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3대 명물로 꼽힌 곳이다.

중앙대교당은 ‘빈 분리파’풍의 건축물인데, 이는 기존의 학문적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어느 한 양식이 아닌 다채로운 건축 양식을 수용하는 형식인 셈이다. 중앙대교당은 이 빈 분리파풍으로 건축돼 여러 양식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외관은 붉은 벽돌에 흰 화강석으로 일부분이 강조됐다. 색의 조화가 잘 이뤄져 있으며, 건물에서 율동감이 느껴진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첨탑은 푸른색을 띠고 있는데, 100여 년의 역사를 대변하듯 얼룩덜룩한 부분도 보인다.

정면에서 보면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건물 하단은 화강석이 받치고 있으며, 현관에는 반원 아치형 출입문이 나 있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천지일보(뉴스천지)

출입문을 따라 대교당에 들어가니 시야가 확 트였다. 넓기도 하고 길기도 한 내부. 가장 신기한 것은 큰 규모인데도 기둥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건립 당시 일본은 대교당 건물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면서 제지했다고 한다.

이에 원래 계획의 1/2 규모로 축소해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원래 규모대로 건립됐다면 그 규모가 엄청 났을 듯하다. 대교당 양 옆으로 난 창문은 현관 입구처럼 반원 아치형 형태다.

이곳은 천도교의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공간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3.1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민족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립 당시 일본의 방해가 있었음에도, 300만 천도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됐다. 우리 민족의 힘으로 지은 건축물인 것이다.

당시 건축 자금으로 모인 액수는 비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3.1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당시 이곳에서 천도교의 종교의식 행사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집회, 강연회가 열렸다.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일제강점기에 중앙대교당은 우리 민족이 모이는 곳이자 독립을 위한 움직임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이에 일본은 모금 운동부터 건립까지 갖은 이유로 방해했다. 하지만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져 굳건하게 건립됐고, 여전히 서울 한복판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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