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영세중립통일 협의회 회장

미국은 1871년(신미년) 5월 30일 전함을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한국에 개항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미리견(彌利堅: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고종(高宗)의 어전회의 질문(4월 20일)에 대해,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은 고종에게 “미리견은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최근에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이 세운 야만국가로, 마치 개나 양과 같이 도덕과 윤리가 없으며 해적처럼 노략질을 좋아하고, 오직 그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나라”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고종은 “개나 양과 같이 도덕과 윤리가 없는 나라와는 수교할 수 없다”고 개항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신미양요(辛未洋擾: 신미년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킨 사건)’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왜곡된 인식에 바탕을 둔 역사의 기록으로 오늘날 디지털 세대의 학생들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6월 10일 전함 4척과 군인 1393명으로 구성된 미군부대를 강화도에 보내 무력에 의한 한국의 개항을 시도했다. 킴벌리(L. A. Kimberly) 중령을 대장으로 한 미군의 상륙부대는 6월 10일 오후 별다른 전투나 저항 없이 강화도 한강 하구에 위치한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했다. 미군의 강화도 상륙 소식을 보고 받은 한국 정부는 강화도에 호랑이 잡는 포수를 증원하는 한편, 진무대장 어재연(魚在淵)에게 방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6월 11일(일요일) 오전 7시, 미군 공격부대는 덕진진에서 약 2㎞ 떨어진 광성진(廣城鎭)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광성진 전투는 오전부터 백병전으로 시작하여 12시 45분 끝났다.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의 진무대장 어재연(魚在淵)과 장병 35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의 전사자는 맥키(Hugh W. Mckee) 대위와 하마한(Dennis Hamahan) 수병과 알렌(Seth Allen) 수병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했다.

광선진의 백병전 후, 미군은 상당량의 한국 문화재를 약탈했다. 로저스(John Rodgers) 사령관은 한국군의 수자기(帥字旗)를 비롯하여 갑옷, 무기, 고서, 문화재 등을 네 상자로 포장하여 미국 대통령, 국무장관, 해군사관학교에 보내고, 나머지 한 상자는 자신의 집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신미양요’의 명칭과 한국군의 전사자 숫자이다. 첫째, ‘신미양요’는 어떠한 의미를 설명하는 데 내용이 부족하다. 우선 ‘신미양요’의 연대를 이해하기 어렵고, 전쟁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신미양요’에 대해 미국의 케이블(E. M. Cable) 같은 교수는 “미국이 한국에 선전선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뉴욕타임스는 ‘신미양요’에 대해 1871년 8월 22일자 보도에서 ‘한국전쟁(The Corean War)’으로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둘째는 ‘신미양요’에서 희생된 한국군의 전사자 숫자 문제이다. 고종실록은 한국군 53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나 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의 자서전에서 한국의 전사자를 343명으로 보도하거나 기록하고 있다. 이 중 243명은 광성진 백병전에서 전사한 숫자이고, 나머지 100명은 미군이 발사한 실탄에 의해 9겹으로 누벼진 갑옷에 붙은 불로 뜨거워서 한강물로 뛰어내린 숫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신미양요’를 ‘한국전쟁’으로 표기하면, 6.25전쟁과 혼돈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한미전쟁’으로 표기하고, 한국인의 전사자도 고증을 거쳐 보다 정확한 숫자가 기록되기를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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