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우 강학회 상상도.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 순교

윤지충·권상연보다 4년 앞서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하느님을 믿는 신앙만 포기하면 풀어주겠다.”
“나는 배교를 거부한다.”
“네 몸이 성치 못할 것이며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 중심에 서 있던 김범우(金範禹, 세례명 토마스, 1751~1787)는 모진 고문과 형벌에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전주시 전동에서 정조 15년(1791)에 처형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박해 당시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보다 4년 앞서 1785년 김범우는 고문을 이기고 유배를 당한 후 상처가 악화돼 2년 뒤인 1787년 목숨을 잃었다.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엄밀히 따지면 김범우가 한국가톨릭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셈이다.

김범우가 활동했던 무대는 지금의 명동대성당이 위치한 일대인 명례방이다. 명례방은 남산 밑 여러 마을과 지금의 명동성당 근처를 아우르는 구역 명칭으로 조선시대 한성 5부에 속하는 남부 11방(坊)의 하나다. 김범우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명례방은 이후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 성지로 기록을 남긴다.

이곳에서 김범우는 1751년 역관의 8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범우는 종6품 한학주부에 오를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벽(李檗, 세례 요한, 1754∼1786)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한 후 신앙심이 깊어지며 전도를 하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범우는 가족, 친지를 비롯해 자신과 같은 신분의 중인이나 천민들에게까지 천주교 교리를 전하며 적극적인 입교 활동을 펼쳤다.

1784년에는 명례방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는데, 현재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에게 명례방 신앙공동체는 까따꼼바(지하교회)의 의미를 갖는다.

그만큼 드러내놓고 신앙을 하지 못했고 집회 등도 비밀리에 했어야 했다.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이뤄진 데에는 김범우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집회를 할 수 있도록 집을 집회장소로 내놓았다.

하지만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785년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됐다.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설교하다가 발각됐지만 잡혀가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범우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양반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집 주인이자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끌려갔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이 큰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김범우만 남겨두고 참석자들을 모두 훈방 조치했다. 그렇지만 형조판서는 김범우에게는 여러 가지 고문을 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김범우는 배교를 거부했고 심한 고문과 형을 받은 후 유배를 당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천주교 최초의 박해 건으로 기록된다.

이후 사대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김범우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충청도 단양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 유배지에 도착해서도 큰소리로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또한 이후에도 전도와 포교활동에 열심을 내다 고문의 상처가 깊어져 2년 후인 1787년 9월 14일 3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김범우의 묘는 순교자현양위원회가 몇년에 걸쳐 지역답사와 수소문 끝에 1989년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의 도움으로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동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찾게 된다. 이후 김범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그 신앙에 대해 재조명이 이뤄졌다.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 땅을 매입하여 묘지 조성 사업을 진행했고, 지리산에서 원석을 가져다가 최영심의 그림으로 십자가의 길과 간단한 한국교회사 약술을 새겨 넣었다.

김범우 묘지 입구의 상석에는 최재선 주교, 김범우의 상석에는 이갑수 주교, 제대에는 정명조 주교가 친필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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