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영세중립통일 협의회 회장

한국의 근대사는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양을 침략하여 영토를 강탈하는 서세동점(西世東漸)의 시기와 상당부분이 중첩된다. 서양국가의 침략주의를 모방한 일본은 포함외교(砲艦外交)로 한국을 무력으로 개항하고, 국권을 찬탈한 후, 강제로 식민지로 병합시켰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사는 한국인이 주체의식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고, 일본학자에 의해 기술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왜곡된 한국의 근대역사를 고증을 통해 올바르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초중고교의 역사 교과서에는 조선(朝鮮)의 제26대 고종황제(高宗皇帝: 1864~1907 재위)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을 “쇄국주의자(鎖國主義者)”로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도 이를 인정하면서도 대원군이 어떻게 해서 쇄국주의자의 칭호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역사에서 ‘쇄국’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동경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하야시 다이수케(林 泰輔)가 1912년 저술한 ‘조선통사(朝鮮通史)’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는 대원군의 집권 시기에 대해 조선이 수십 년 동안 “쇄국의 성벽”을 쌓아 외부와 단절한다고 조선의 쇄국주의를 설명한다.

대원군에 대한 호칭은 하야시의 ‘조선통사’가 출판된 시기를 전후해서 확연하게 상이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사’가 출판되기 이전까지 미국이나 서구 학자들은 대원군에 대한 표기를 “조선의 섭정” “궁중의 군주” “폭군” “왕의 아버지” “대원군” “섭정 대원군” “보수주의 정치가” “섭정 전하” “조선왕의 섭정”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느 서양인도 대원군을 쇄국주의자나, 또는 그와 비슷한 용어로 기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2년 이후에 출판된 대원군에 대한 외국인의 기록들을 보면 대부분 쇄국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원군을 “고립주의자(isolationist)” “배타주의자(exclusionist)” 또는 “은둔주의자(seclusionist)” 등으로 쇄국주의와 유사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하야시 교수가 저술한 ‘조선통사’를 일본이 영어로 번역한 후, 세계에 배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하야시 교수의 ‘조선통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집필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현재까지 대원군을 쇄국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대원군에 대한 역사기록을 ‘쇄국주의자’로 계속할 것인가, 또는 다른 호칭으로 할 것인가를 우리는 이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 등 조선의 실록에는 ‘쇄국’이란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양이보국(攘夷輔國: 서양오랑캐를 격퇴하여 나라에 보답하자)” 정책을 수차 강조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토록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해서 필자는 대원군의 칭호를 '쇄국주의자' 대신 ‘보국주의자(preservationist)’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용어의 의미에서도 쇄국주의는 ‘외국과의 통상을 거절하고 국가의 문호를 걸어 잠근 것’을 나타내는 소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보국주의는 ‘국가를 방위하고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 적극적인 방위개념과 애국심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쇄국주의’라는 용어는 한국인이 만든 순수한 우리의 단어가 아니고, 일본 역사학자가 창안한 단어로 대원군의 양이보국 정책과 이념에도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라도 대원군에 대한 호칭문제를 정부나 관계당국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올바로 표기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검토해 줄 것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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