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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분열․약해진 국력… ‘마치 오늘날 정세와 흡사’

◆ 당파 싸움으로 쇠퇴해진 국력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인 1592년 임진년. 조선에는 길고도 고통스런 전쟁이 시작됐다. 임진왜란은 당파 싸움에 빠져 무력해진 조선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일본의 오판에서 발발된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 대에 이르는 4대 사화․훈구․사림 세력 간 계속된 정쟁으로 인해 정사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중쇠(中衰)의 기운은 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에 설치됐던 국방 체제가 붕괴된 상태였다. 대비 상황을 위한 방책으로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뒀지만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형국에 이르자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 즉 남으로는 왜구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다.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선조수정실록’의 1582년 기록을 보면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국가재정 허약 등의 이유로 묵인됐으며, 오히려 배척당했다.

◆ 침략의 야욕 드러낸 일본

일본은 침략에 앞서 자국의 새로운 왕을 승인하고 축하해주기를 간절히 간청하며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허나 이는 대의명분일 뿐 일본의 속내는 조선의 염탐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이러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西人),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東人),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이끄는 2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을 맞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일본이 명을 치고자 하니 함께 명을 치거나, 길을 열어 달라’는 요구를 했다.

1년여 만에 돌아온 사절단은 선조에게 보고를 했는데, 황윤길과 허성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 주장하며 징집과 훈련을 건의했다. 그러나 선조는 군병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사진제공: 현충사)

◆ 임진왜란 정세, 대한민국 현재와 유사

결국 일부 선견지명을 가진 이들의 의견을 묵살한 조선 조정(朝廷)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왜적의 침임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궁궐까지 침략 당했고, 7년간 나라 전체가 전쟁의 고통 속에 지내야했다.

조선 내 당파 싸움과 조직의 분열은 국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었다. 이미 일본의 침략 야욕이 명약관화(明若觀火)했지만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조정은 충신들의 간언(諫言)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사전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당파 싸움에 빠져있던 조선의 조정은 백성을 돌보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돈다고 했던가. 오늘날 대한민국 정세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정황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안으로는 숱한 인재가 있었지만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돼 국가적인 역량을 한곳으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 한미 FTA, 무상급식 찬반 논쟁 등으로 안으로는 혼란스럽고, 밖으로는 북핵문제, 한미관계 등의 불편한 외교적 상황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왜란을 자초한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나라는 어지러웠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나라와 백성을 지켰던 이른바 ‘난세의 영웅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2012년 임진년 한 해도 난세, 난국을 해쳐나갈 영웅의 존재가 절실해 보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찾아온 2012년 임진년, 나라를 구해낼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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