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어머니는 1928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84세, 능히 심신이 쇠해질 만한 연세다. 그래서 그럴까, 이즈음 들어 어머니는 종종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또한 뜬금없는 말을 불쑥 내뱉는 경우도 많았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더니 머릿속을 비롯하여 몸 이곳저곳에서 시나브로 뭔가가 빠져나가는 모양이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일어에 능통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버지와 말다툼이라도 할 양이면 두 분은 노상 일어로만 주고받았다. 부부 사이의 티격태격하는 내용을 자식들 앞에서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한 한 방편이리라. 두 분 다 일어를 잘하는 건 일제(日帝)하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이지 싶었다.

어머니의 생활방식을 보면 일본식 사고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마치 어릴 때의 가르침이 사람의 일생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 사례를 보여주는 것같이 말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피해를 주는 행동이나 무례한 언사를 내뱉는 어머니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평소 우리들한테 타이르는 말도 늘 이랬다.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돼.’
살림살이 또한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아버지는 공직에 계셨는데, 그 어렵던 시절 빠듯한 봉급으로 누나 둘과 나, 이렇게 3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했던 것도 다 엄마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시고서도 두 분은 따로 사셨다. 연금으로 생활은 꾸려갈 수 있기도 했거니와 누구한테든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더 컸던 때문이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연세는 이미 일흔 여덟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내처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우리 남매들은 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바,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윤번제로 합의를 한 건 누구 한 사람이 모시면 너무 부담이 많을 거라는 예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곳에 계시면 어머니가 답답해할 거라는 노인네의 불편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 점, 우리 남매는 다른 집보다 우애가 남다른 편이었다. 서로 어머니를 보살피려 했으므로. 이 또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당신께서 자식 복은 있는 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딸 아들은 물론이고 그들한테서 본 사위들과 며느리 역시 한 마디로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동일본대지진’은 세계를 경악게 했다. 그 엄청난 피해라니! TV로 현장중계를 보며 나는 신음을 삼켰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희생된 인명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피붙이나 이웃들이 물살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런 참상을 겪은 주민들의 반응이었다. 혈육을 잃었는데도 그들은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줄기 눈물은 보일망정 결코 격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거나 땅바닥에서 뒤집어지는 행동 따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저토록 차분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인내였다. 과격하게 표출된 슬픔이 보는 이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고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남에 대한 배려 때문이지 싶지만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만일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언젠가 어느 정치인이 ‘짐승처럼 울부짖는’이란 표현을 했다가 아주 혼쭐이 난 사례도 있지만 사방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풍경이 벌어지지 않았을는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큰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이 네가 엄마 모셔가는 날인데, 괜찮겠니? 뭣하면 우리 집에 내처 계셔도 상관없어. 엄마도 딸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아냐. 예정대로 모시러 갈게.” “그런데 말이야….”

큰누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큰누나의 머뭇거림이 어머니의 치매 때문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왜, 더 심해지셨어?” “음, 좀 그래. 아무튼 네 마누라가 신경께나 써야 할걸.”
어머니의 이상증세가 처음 드러난 건 지난해였다. 어느 날인가 큰누나 댁에 어머니를 모시러갔을 때 나를 본 당신께서는 옛날 같지 않은 반응을 보이셨던 것이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만 뚜벅 이렇게 물었다.
“댁은 뉘시우?”

그날 이후 어머니의 돌발적인 행동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왔다. 이를테면 작은누나가 어머니를 모셔가기 위해 우리 집에 왔을 때는 갑자기 몸을 사리며 이같이 말했다.
“나는 남한테 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는 인간이 되는 건 싫다우. 아직 충분히 혼자 살 수 있으니까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구려.” 올해 들어 어머니의 뜬금없는 행동은 갈수록 그 빈도수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매기는 항상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결코 남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유의 주장을 할 때만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증상의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문제는 정신이 흐려질 경우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또한 그런 증상이 치매의 가장 고약한 점이기도 했다. 근간에는 어머니의 건강 또한 치매기가 늘어난 이후로 점점 더 나빠지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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