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과 유배 문화.

관습 따라 절해고도로 유배
편지·일기에 시대상 나타나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시대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다섯 가지 형벌 중 하나였던 ‘유배’. 당시 유배는 종신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 속에서 유배인들은 유배지로 가는 여정과 생활 등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 기록 자료를 통해 당시 시대상과 유배생활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섬은 고려 때 몽고군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피 장소로 이용됐고, 이에 정부의 관리 대상이 됐다. 그러나 해양세력인 삼별초가 내륙정부와 겨루다가 토평(무력으로 쳐서 평정함)된 뒤 섬은 정치와 멀어졌다. 이를 계기로 중앙권력이 힘을 잃은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는 집단 세력을 이룬 섬사람들은 왜구로 취급받았다는 게 수적(囚籍, 죄수 명부)에 기록으로 남았다.

당시 조선에는 규정은 없었지만 육지에 살던 천민(賤民)들이 죄를 지으면 모두 섬으로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세도가 들은 무주지(無主地)인 섬에 노비들을 파견해 개간을 핑계로 해산물 채취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는 섬에 대한 정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은 16~17세기에 들어와 섬에 수군진을 집중적으로 개설했다. 수군진의 개설로 섬의 관리가 가능해지면서 섬은 유배지로 이용됐다.

섬에 유배된 사람 중에는 중앙의 관리나 학식이 높은 선비가 많았고, 이들을 통해 섬은 더 이상 소외된 천민 집단이 아닌 중앙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이 됐다.

뛰어난 학식을 지닌 유배인들은 자연과 벗해 섬 생활을 하면서 가사문학과 시, 안부 편지 등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멀고 험난했던 유배지 여정은 유배인들의 유일한 소식통인 편지나, 힘든 유배생활에 자신을 위로하듯 일상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흑산도와 추자도, 제주도 등의 험난한 바닷길은 일기와 시, 편지에 자주 소개됐다. 김약행은 ‘우이도에서 가까운 대흑산도 유람조차도 거친 파도 때문에 쉽지 않았다’고 했으며, 정약전은 그를 찾아 우이도에 오겠다던 아우 정약용과 제자 이강회에게 ‘거친 바다를 건너오게 할 수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진유도 추자도에 닿기까지 배 안에서의 처절한 상황과 외로 운 섬 생활을 시로 표현해 남겨 놓았다.

한편 유배인은 왕족부터 양반, 중인, 평민, 천민, 여자, 어린이까지 다양했다. 친인척의 죄에 엮여 가문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도 많았다. 왕족은 대부분 정쟁에 휘말리거나 권력 남용 등으로 유배됐다. 조선시대 서남해 일대의 유배인은 56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15세기에 80여 명, 16~17세기에 40여 명, 그리고 18세기 영ㆍ정조 때에는 2배로 증가했으며 한말에는 크게 늘어났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추자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정조 때의 문신 안조환의 장편가사집인 ‘만언사’와 임자도에 유배됐던 조희룡의 ‘매화도’, 흑산도와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영·정조 시기 문신 김약행의 ‘적소일기’ 내부. (사진제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