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음주·축첩·민며느리제 등 주요 치리대상 엄격히 치리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는 독특한 문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외국에 서 파송된 복음 선교사가 입국하기도 전에 신자들이 먼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초대교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고, 오늘날 기독교의 바탕이 됐다.

이렇게 1887년 9월 27일 우리나라 에 처음 지어진 기독교 초대교회가 바로 ‘새문안교회’다. 새문안교회는 정동교회와 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로 이름을 기록했다. 감리교 정동교회보다 장로교 새문안교회가 12일 정도 먼저 설립됐다.

새문안교회가 세워질 당시 한국교회 상황을 살펴보면 선교사는 없었지만 기독교인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글성경(쪽복음서)이 이미 간행돼 반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스스로 성경을 읽고 알고 싶은 마음에 입교하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이 때문에 선교사가 들어가 성경을 포교를 하는 나라들과는 다른 특수한 종교문화를 갖게 했다.

이 당시 상황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의 편지로 살펴보면 그가 들어오기에 앞서 한국에는 전국을 돌며 성경과 전도지를 판매하는 매서인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서상륜이다. 서상륜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이미 서울 장안에만 해도 70여 명이 세례받기를 원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즉, 복음을 가르치는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신자가 생겨났고, 그들이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입교자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할 정도로 상당히 믿음이 좋았다.

새문안교회는 점차 늘어가는 교인 들을 바탕으로 창립됐다.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배움과 동시에 교회에서의 사역과 전도 또한 감당해야 했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시초인 만큼 가장 먼저 장로 2명을 선출하고 안수하는 것으로 조직교회를 결성했다고 판단했다.

교회가 세워질 당시에는 치리가 아주 엄격했다. 주요 치리 대상이 된 것은 불륜, 음주, 성수주일 위배, 축첩, 민며느리제, 불합한 혼사, 남녀학생 간 편지 등 다양했다.

불륜은 6개월간 교회출석을 정지시키고 축첩을 할 경우는 출교조치가 내려졌다. 부도덕한 교인에 대한 정화차원이었다.

이렇게 창설된 새문안교회는 청일전쟁 이후 교인수가 급증했다. 1895년에는 예배당을 지금의 경희궁 맞은편인 서대문 안쪽 대로변으로 옮겼다. 이후 명칭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정동예배당 혹은 정동교회 로 불리다가 이후에는 정동교회, 서 대문교회, 새문안교회로 혼용돼서 불렸다.

현재 위치인 신문로 1가 42번지로 교회를 옮긴 것은 1907년이다. 이후부터는 새문안교회로 불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문안교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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