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그 해의 평양은 스포츠에 관한 한 뜨거운 남북의 공동함성을 토해냈다. 남북한이 사상 처음으로 축구와 탁구에서 세계 규모의 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을 왔다갔다하며 해빙무드가 잔뜩 고조됐다. 남한의 10대 남자축구선수들은 판문점을 거쳐 개성에서 열차를 타고 2시간여 만에 평양에 도착,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들에게는 평양이 오랜 군사적 대결을 낳게 한 무시무시한 장소가 아니었다. 다만 이념과 체제의 벽을 넘어서 스포츠를 끈으로 하나가 되는 화합의 무대가 펼쳐지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남북한 선수들의 표정은 티 없이 밝았고, 기자, 수행원 등도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1991년 5월 무렵이었다. 취재기자로 평양을 갔던 필자는 지금도 당시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을 듣고 20여 년 전의 평양이 생각난 것은 지금과는 남북한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리라. 당시 남한은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중국과 러시아와 수교를 했고 북한과도 교류가 움트기 시작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철권통치를 이끌던 김일성, 정일 부자가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체제 위기를 느껴 남한은 물론 미국, 일본 등 서방국가와 정치 및 경제교류를 활발하게 모색하던 터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남북한 교류에 본격적으로 봇물을 터뜨린 것은 스포츠였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직후의 남북한 축구교류를 신호탄으로 다음 해에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한반도기를 앞세워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낳았다. 단일팀은 세계탁구 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난공불락의 중국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8강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정일 부자의 강력한 통치를 바탕으로 스포츠에서 남한과 단일팀 구성과 교류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남북한 스포츠 교류는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 통일 농구대회, 시드니 올림픽 선수단 공동 입장 등의 이벤트가 이어졌다. 예측불허의 변덕스러운 김정일이었지만 1994년 아버지 김일성의 사후에도 적극적인 스포츠 교류를 추진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는 북한의 경제난과 국제적인 고립 등으로 인해 남북스포츠 교류는 꽁꽁 얼어붙었다.

김정일 사후, 북한의 스포츠에는 어떠한 변화가 올 것인지가 궁금하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스포츠라고 특별한 예외가 없다. 국가의 방침에 따라 각종 스포츠 정책이 결정되고 남한과 외국 간의 교류도 영향을 받는다.

특히 장웅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체육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남한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해당하는 정부의 부서장으로 국가체육의 모든 사항을 책임지고 있다. 오랫동안 장웅이 위원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국가의 정책 방향에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북한의 분위기이다. 따라서 현재 김정일이 갑작스레 타계한 직후 권력 공백을 얼마나 빨리 메우느냐가 중요하다. 정치와 군사를 우선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상 차기 국가지도자로 부각되고 있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북한 내부질서를 잡고 정상적인 체제를 확립하는지가 관건이다.

북한이 김정일 말기처럼 대외 스포츠정책에서 ‘고립’을 선택할 것인지 ‘개방’을 선택할 것인지는 체제의 방향이 어떻게 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그 시기와 방법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북한은 경제불안과 외화난으로 지난 수년간 올림픽 등 국제대회 참가를 가급적 억제하고 국내 스포츠 활동도 크게 위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국제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들은 남한 선수들과의 접촉도 회피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이 하루빨리 스포츠에서 화사한 봄날을 맞아 활발한 대내외 활동을 하기를 기대한다. 20년 전 남북한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며 꽃을 피웠던 스포츠의 교류가 김정일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한번 움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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