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제나라에서 수십만 금의 재물을 모은 범려는 제나라의 재상 자리를 사양하고 그동안 모았던 재물을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몰래 제나라를 떠나 도(陶)나라로 갔다. 도나라는 천하의 중심지로 물자의 유통이 활발했다. 경제 활동으로는 더 이상의 유익한 장소가 없다고 범려는 판단했다.

그는 다시 이름을 바꾸어 도주공(陶朱公)이라 짓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 자기 아들들과 함께 농사와 목축에 힘썼다. 여기서도 얼마 가지 않아서 큰 재물을 모았다. 도주공의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도나라에 옮겨 온 뒤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막내가 30세가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실수로 사람을 죽여 붙잡혔다. 범려는 번민을 했다.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은 당연하다. 그러나 부자의 자식은 보통사람과 달라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범려는 막내아들을 초나라에 보내 일을 꾸미기로 했다. 서둘러 황금 일천 일(鎰, 1일은 24냥)을 옷상자에 감추어 소달구지에 실었다.

막 떠나려고 하는데 큰아들이 나타나 꼭 자기를 보내 달라고 나섰다. 범려는 큰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큰아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큰아들은 집안의 대소사 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차남이 중죄를 저지른 지금 저를 제쳐 놓고 막내아우를 보내시는 것은 제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죽고 말겠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서 부인이 뛰쳐나와 남편 범려에게 말했다. “막내를 보낸다고 해서 둘째를 살린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로 큰애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범려는 할 수 없이 큰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초나라에 있는 장생은 옛 친구로 초나라의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 신임이 두텁기 때문에 그에게 편지를 쓰고 큰아들에게 말했다. “초나라에 가거든 가지고 간 황금을 장생에게 모두 주고 모든 일을 맡기도록 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범려의 아들은 황금 외에도 따로 수백 금을 지니고 초나라로 떠났다.

마침내 초나라 장생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도읍의 교외에 있으며 집 둘레에는 풀이 무성했다. 풀을 헤치고 대문까지 이르니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편지를 내밀고 일천 일의 황금을 내어 주었다. 그때 장생이 말했다. “자네는 초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되네. 즉시 집으로 돌아가게. 또 한 가지, 설령 아우가 석방되더라도 그 이유를 절대 캐묻지 말게.” 그러나 장생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큰아들은 도읍에 머물며 아버지가 따로 준 수 백금의 황금을 초나라 실력자들에게 뿌리고 다녔다.

장생은 몹시 가난했으나 그가 청빈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왕을 비롯해서 나라 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범려에게서 받은 황금을 조금이라도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조용히 언질을 주었다. “이 돈은 도주공으로부터 맡아 둔 것이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돌려주어야 하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오.”

그러나 범려의 큰아들은 장생의 정직한 마음을 너무 몰랐다. ‘아무리 장생이라고 하지만 돈 앞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군.’ 그는 그렇게 단정해 버리고 말았다.

장생은 때를 살펴서 궁궐에 들어가 왕을 만났다. 그는 왕에게 조언을 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재난을 당할 것 같습니다.” 왕은 장생의 인물됨을 알고 신뢰했으므로 재난을 면할 방법을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장생은 “재난을 면하려면 왕께서 덕을 베푸셔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장생의 의견에 찬성해 당장 신하를 시켜 금, 은, 동을 모아둔 창고부터 봉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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