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어둡고 깊은 갱도의 끝이 막장이다. 막장은 더 파 들어갈 여지가 없는 곳이다. 갱도를 파 들어가는 것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캐내려는 희망에 의해서지만 막장은 그 같은 희망이 소진된 곳이다. 그러니까 막장은 절망이 지배한다.

우리 정치가 막장에 다다른 느낌을 준다. 안철수의 그림자에 쫓기던 정치판은 그야말로 지리멸렬이다. 집권 여당이나 야당을 따질 것이 없이 다 똑같은 모습이다. 그래도 달콤한 기득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들어준다.

우리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심판은 끝났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분노를 잘 알고 그 분노가 그들을 심판했다는 것도 잘 안다. 그 같은 분노는 전체 정치인에 대한 총제적인 분노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는 선별적인 분노와 심판이 아닌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치인들의 행태가 예전과 달라지지 않으니 이 정치판은 필시 무슨 변(變)을 자초하고야 말 것만 같다.

야당은 통합을 놓고 조폭들의 활극과 같은 폭력 사태를 유발했다. 막장 드라마다. 여당은 지도부가 붕괴됐으며 내홍이 계속되고 있다. 마음을 비운 쇄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모습에 국민들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지고 있다. 한심스럽다. 한심하다 못해 이 나라가 과연 이들 때문에 어떻게 될지 간혹은 심각한 근심을 하게도 된다.

젊은 40대 초반의 초선 홍종욱 의원이 다음 선거에 불출마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처음 발 들여 놓은 정치판에 크게 실망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그에게 실망을 안겨준 정치판을 탓하지 않고 그 같은 정치판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어둡고 검은 이미지의 정치판에서 한줄기 양심의 불빛을 본 듯하다.

그렇지만 사실 국민에게 신뢰로 보답하지 못하는 정치판의 현실에 대해 가책을 느껴야 하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기득권의 꿀물에 취해 있는 다선의 선배의원들일 것이다. 정작 더 큰 가책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웅크려 몸을 숨기고 있지만 국민은 그들을 주시한다. 그들의 검은 속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세상 이치가 묘한 것은 사람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꼭 살려하다가 정말 죽게 되고 망신까지 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어야 될 자리에서 정말 죽을 결심을 하고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가진 것을 다 버릴 수 있다면 그는 살 수도 있다. 국민의 마음먹기에 따라 뜨고 지고가 결정되는 말하자면 살고 죽고가 결정되는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은 정치판에 대한 애정의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정치라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런 덕목이 발현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기를 최후의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북새통과 같은 막장 드라마에나 열중하고 있으니 여기서 느끼는 국민들의 절망감을 뭐라 제대로 형언할 것인가.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을 단속하던 우리 해경대원이 단속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그렇지만 막장 드라마에 빠져있는 정치권의 반응은 그저 무덤덤하다. 사건 당일 중앙당 차원에서 성명을 낸 것은 짤막하고 미지근한 것이긴 했지만 그나마 자유선진당뿐이다. 거대 정당들의 반응은 이 사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분노를 느끼는 국민들과 호흡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국민들의 화난 호흡과 정치권의 반응은 너무 판이한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할 말 못할 말 마구 내뱉는 정치권과 정치지도자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왜 아무 소리를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혹여 요새 유행하는 말로 그들은 중국에 ‘쫄았나’?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에 대해 중국 정부는 적반하장이고 위압적이었다. 불법 조업을 묵인하는 듯했다. 언젠가 우리 해경이 불법 조업에 나선 중국어선 3척을 나포했을 때 중국 대변인의 성명은 참으로 듣기 거북했다. 그들은 성명에서 한국 측에 ‘문명적인 법집행(文明執法)’을 요구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불법 조업은 ‘문명’이고 이를 단속하는 한국의 정당한 법집행은 ‘야만’이 우려된다는 것인가? 이렇게 기분 나쁜 소리를 왜 국민이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 정부는 왜 저자세로 일관해 그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가? 왜 쓸데없는 일에 악 잘 쓰는 우리 정치권과 그 지도자들은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주어야 할 일에는 조용하단 말인가?

정치인들은 또 한 번 국민들의 ‘시험’에 걸려들었다. 그들의 관심이 짐작한대로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기득권 싸움 즉 막장 드라마에 가 있다는 것을 실감시켜준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니지 않은가. 어민들의 생존권과 우리의 어업주권이 침탈당한 문제다. 그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함으로써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절망감을 심화시켰다. 이 한 가지 일이 열 가지 일을 알게 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민족의 스승 정약용은 말했다.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 非詩也)’. 이 말을 정치에 적용하면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정치인은 참다운 정치인이 아니다’. 그런 정치인들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악화(惡貨)다. ‘양화’가 떠날 것이 아니라 ‘악화’가 정치판에서 떠나야 한다. 그래야 정치도 살고 나라가 산다.

정약용은 또 이렇게 말했다. ‘시대를 아파하지 않고 시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 정치인들이 그들끼리의 싸움에 빠져있는 동안 뜻있는 사람들의 나라 걱정과 시대와 시속에 대한 아픔과 분개가 커져간다. 정치를 걱정하고 혼란한 시대를 아파하며 나라를 걱정한다.

국민들은 무덤 속의 정막과 같은 정치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정치는 시끄러운 정치다. 정치에 싸움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싸움이 도가 지나쳐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대의를 벗어나면 정치는 명분을 잃는다. 그 같이 명분 없는 싸움이 지금 막장 드라마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것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우리 정치에 절망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 해주기를 기대하는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내뱉지도 삼키지도 못한다. 이 최후의 희망을 짓밟지 말고 떠날 정치인은 떠나고 정치판은 쇄신돼야 한다. 국민의 분노가. 국민의 인내를 시험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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