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천안중학교 사회과 교사(국학박사, 향토사학자)

고 민제(民齊) 박병선(朴炳善) 박사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경성 출생으로 일평생 우리 역사와 문화 연구는 물론 해외 문화재 반환에 헌신하다가 지난 11월 23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서지학자)이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 수녀가 되기를 꿈꾸면서 서울 진명여고와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지도교수인 이병도(1896∼1989) 박사가 어느 날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문서를 약탈해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가서 잘 찾아보게”라고 한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우리나라 민간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소르본 대학과 프랑스 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과 종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인 BNF에 들어가 13년간 사서로 근무하면서 그곳에 깊숙이 사장되어 있던 우리 문화재를 힘들게 찾아내어 실증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그 결과 그는 1972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 한국 코너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하권(1377)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1979년에는 1866년 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297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에 파손된 책으로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리는 바람에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직지심체요절’ 안에 적혀 있던 주조(鑄造)라는 글자를 심층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직지심체요절’이 1455년판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빠른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직지심체요절’이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직지 대모(代母)’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직지’가 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점토로 글자를 만들어 오븐에 굽다가 3번이나 화재사고를 내기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비밀문서를 외부에 공개하여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강제 퇴직을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면서 외규장각 도서를 빌려 10여 년간 목차와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반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145년 만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고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결실을 맺었다.

2002년에는 우리나라 인쇄기술을 알리는 ‘한국의 인쇄’를 불어 및 영문판으로 발간했고, 조선 말기 프랑스에 왔던 외교사절들의 외교문서와 1900년 만국박람회 고문서를 발굴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내에 산재해 있던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한 사료를 모아 총 5권의 책을 낼 계획이었으나, 2006년에 ‘프랑스 소재 한국독립운동 자료집’ 1권이 나온 뒤 정부의 지원이 끊겨 아쉽게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2008년에는 프랑스가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하는 과정을 정리한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1권을 발간했다. 이 밖에도 그는 ‘조선왕조의궤’ ‘한국의 무속사’ ‘한국의 역사’ 등을 발간하여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0년 1월 경기 수원시 성빈센트병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병인양요 관련 저술 준비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병세가 악화돼 2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지난달 19일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애석하게도 11월 23일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유족들에게 유언으로 “자신이 숨지면 화장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에 유해를 뿌려주고, 그동안 준비작업을 해 온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2편’의 저술을 마무리 지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한국 정부 당국자에게 프랑스 법원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했다는 부분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4∼5월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사정에 의해 ‘반환’이 아닌 ‘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온 것에 대해서 “잘못된 일”이라며 “하루빨리 대여를 반환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말년에 가정 경제가 어려워 프랑스 정부에서 지급하는 연금으로 연명하고 병원 치료비가 부족해 제때에 치료도 잘 받지 못했음에도 후학 양성에 써달라고 그의 유산 2억 원과 장서 9상자를 인천가톨릭대학교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부하고 별세하여 기부문화를 범국민적으로 확산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그는 1967년 발생한 동백림 사건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지만, 1979년에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확인해 국내에 알림으로써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워 대한민국 문화훈장(1999), 국민훈장 동백장(2007), 제7회 비추미 여성대상(2007),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2010), 제7회 경암학술상 특별공로상(2011) 등을 수상했고, 사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우왕 3년(1377)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것으로 청주시가 1996년 5월부터 ‘직지심체요절 상권 찾기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고, 박병선 박사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가 하면, 그를 위해 국민 성금을 거두고 직지연구소까지 개설해 운영했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첫째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Manuscrit Orianteaux)에 소장되어 있다가 프랑스 정부 사정으로 반환이 아닌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1년 6월 17일 YTN 보도에 의하면, 서지학자인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고미술 콜렉션에서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한 금속활자 100여 점을 분석한 결과, 이 중 12점이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인 ‘증도가자(證道歌字)’임을 확인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해 중원대 연구교수인 이상주(58, 한문학) 박사와 경북대 남권희(54. 문헌학) 교수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박병선 박사는 한국정부의 지원이 끊겨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산재되어 있던 항일독립운동사 관련 사료를 정리하다가 도중에 끝낼 수밖에 없었으며, 병세가 악화되어 그동안 준비작업을 해 온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2편’의 저술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우리 후손들이 박병선 박사의 유지를 받들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그가 끝맺지 못한 과제를 완결하고, 지금 한・중・일 간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또한 해외에 약탈당하거나 밀반출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반환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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