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세월이 흘러 오왕 합려가 죽은 뒤 월왕 구천은 오나라 부차와의 잦은 전쟁에서 패하여 하마터면 나라를 잃을 뻔했었다. 월왕 구천은 20년의 세월을 회계산에서 아침마다 곰쓸개를 핥으며 와신상담 끝에 오왕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평정한 뒤 치욕을 씻었다. 구천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당장 군사들을 북으로 몰아 회수를 건너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두 제후와 선주에서 맹세하고 주(周)왕실에 공물을 바쳤다. 주왕실의 원왕(元王)은 구천에게 종묘의 공물을 주었으며 또한 그에게 패자의 칭호를 주었다.

구천은 회남을 건너서 영토를 조정했다. 회수 유역의 땅은 초나라에 주었다. 오나라가 송나라한테서 빼앗은 영토는 본래대로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노나라에는 사수 동쪽의 땅 사방 백리를 할양했다. 월나라는 양자강과 회수 유역 일대에서 세력권을 펼쳤는데 그때 제후들은 모두 월나라를 살폈고 어느 누구도 거역하지 않으려 했다. 구천은 스스로 패왕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 무렵이었다. 월왕 구천과 항상 험난한 고난을 함께하며 성공할 때까지 곁을 지켰던 충신 범려가 그의 곁을 떠났다. 구천은 문종과 특히 범려라는 인물이 옆에 있지 않았다면 나라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결코 회계산의 치욕도 씻을 수 없었고 패자도 될 수 없었다. 범려는 미련 없이 월을 떠나 제나라로 옮겨가서 아직 월나라 대부로 있는 문종에게 서신을 보냈다. “비조가 사라지니 양궁을 거두었고 교활한 토끼를 잡으니 개를 삶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월나라 왕은 목이 길고 입술이 검습니다. 좋지 못한 인상입니다. 고난은 같이할 수 있어도 기쁨은 남과 나누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대부께서도 물러나심을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 뒤부터 문종은 몸이 불편하다고 집에 들어 앉아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종을 헐뜯는 자가 있었다. 문종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월왕 구천이 문종에게 칼을 내리면서 명령했다. “귀공은 나에게 오나라를 토벌하는 비결이 일곱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으나 내가 실제로 쓴 것은 그중 셋뿐이다. 나머지 넷은 아직도 귀공에게 있다. 이제는 돌아간 선왕에게 가서 그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종은 그 칼로 목숨을 끊었다.

월왕 구천이 패자가 되고 천하를 호령하게 되자 범려를 상장군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임명했다. 범려는 월나라가 안정이 되자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절정에 오른 군주 곁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하다. 구천은 고난은 함께 나눌 수 있어도 영화는 함께 나눌 인물로 믿어지지 않는다.’ 범려는 왕에게 정중하게 상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아뢰었다. “주군께서 어려운 때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신하의 도리입니다. 왕께서 회계산에서 그 치욕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살아왔던 것은 오로지 오나라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그 목적을 다한 지금이야말로 그 죄를 보상받고 싶습니다.” 구천이 말렸다. “나는 귀공과 더불어 나라를 둘로 나누어 다스리려고 하는데 만약 승낙하지 않을 때는 귀공을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범려는 왕의 사자에게 말했다. “나라는 혼자 다스리십시오. 저는 제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습니다.”

조정에서 물러난 범려는 보석 등 재물을 배에 가득 싣고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다시는 월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월왕 구천은 범려의 뜻을 꺾지 못하고 그가 기어이 곁을 떠나가자 회계산 일대에 표지를 세우고 범려의 봉읍으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간 범려는 제나라로 옮겨갔다. 그는 이름도 ‘치이자피’라고 새로 짓고 바닷가에서 자식들과 함께 땀 흘리며 밭을 갈고 재산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는 얼마 안 가서 수십만금의 부자가 되었다. 제나라에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재상으로 일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범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천금의 재산을 모았고 관에서는 재상에 올랐다. 필부의 몸으로 그 이상 더 큰 영달은 없다. 그러나 영예가 길게 계속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 그렇게 생각을 굳힌 범려는 제나라의 요청을 사양하고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특별한 값진 재물만 지닌 채 몰래 마을을 떠나 도(陶)나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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