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지도는 변한다. 지도는 바뀐다. 바뀌지 않는다고? 천만에 지금도 바뀌고 있는 중이다. 거미줄처럼 국경선들이 복잡하게 표시되는 지도 상에서 숱한 나라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졌으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가 되기도 하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로 움츠러들기도 했다. 통일된 나라가 찢어지기도 하고 찢어졌다가 다시 합쳐지기도 했다.

그런 관점에서 찢어진 한국이 내일이라도 다시 통일이 될 수 있으며 그 통일 한국이 언젠가 지금보다 영토가 훨씬 넓은 대국이 될 수도 있다. 해체된 소비에트 연방이 다시 한 나라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될지 통일 대국인 다민족 국가 중국이 여러 나라로 갈라지게 될지 누구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지도 상의 국경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제나 잠정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지도를 바꾸어 놓는 것은 주로 전쟁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지도 변형의 극적인 사례다. 국경선이 광활하고 장대한 하나의 선으로 표시되던 대제국의 영토는 긴 가뭄 끝의 마른 연못 바닥이 갈라지듯 15개의 나라로 균열되어 국경선이 다시 그어졌다. 핵전력에 의한 ‘공포의 균형’ 속에서 미국과의 팽팽한 샅바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대제국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었다고? 천만에 엄연한 전쟁이었다. 열전(熱戰)이나 정복 전쟁은 아니었지만 미․소 양국이 사력을 다한 총력전의 대전쟁이었다.

이렇게 소련이 무너져 냉전의 먹구름이 걷힌 뒤에도 지구 곳곳에는 열전의 현장들이 속출하고 언제 열전의 뜨거운 전장으로 변할지 모를 위험 지역들이 늘어났다. 지구 상에는 장구(長久)한 평화가 오는 듯했지만 그것은 잠시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한반도는 빼놓을 수 없는 위험지역이다.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크고 작은 충돌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그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견해다. 전쟁은 없어야 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 국내외 환경을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라면 공감하지만 그 같은 단정은 자칫 정말 전쟁의 재앙을 부를 위험천만하고 나이브(Naive)한 낭만적 발상이다. 전쟁은 방심이 부른다. 심지어 ‘하늘나라에도 전쟁은 있다’.

존 밀턴(John Milton)은 자신의 지식과 식견만으로 썼다기보다 시력을 잃어버린 가운데 영감(靈感)으로 빚어낸 불후의 대작 실낙원(Paradise Lost)을 남겼다. 이 서사시에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전쟁은 벌어진다. 사탄의 군대가 감히 천사의 군대에 도발함으로써 벌어지는 사탄의 군대에 대한 징벌적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양 진영은 치열하게 싸운다. 이렇게 천상에도 전쟁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사는 지상(地上)에서야 말해 무엇 하리.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이 없어짐으로써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들었다는 말은 완전한 픽션(Fiction)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끊이질 않고 그 전쟁의 참화로 인한 고통을 잘 알기에 인류는 항상 평화를 꿈꾼다. 그렇지만 그 평화는 인간의 선의(善意)나 평화에 대한 꿈과 열망으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며 그 힘이 곧 군비(軍備)이고 전쟁에 대한 대비태세다. 인간의 본성은 이 세상에 전쟁과 평화가 있듯이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이 뒤섞여 있다.

말하자면 전쟁은 인간 악성의 발현이며 그 악성의 발현을 막고자 하는 것이 확실한 군비이며 대비태세다. 군비나 대비태세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은 국력이다. 국력은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Hard power)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고 외교 역량이며 정치지도력이자 강건한 국민정신의 총화다. 전쟁은 예수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성현의 말씀이나 그 수많은 선한 신봉자들의 세력으로도 막지 못한다. 역사가 웅변해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적인 힘만이 전쟁을 막아준다. 그것이 인간 세상 아닌가. 역사는 인간의 고상한 정신인 정의(正義)의 승리를 말해주는 물증의 기록이 아니다.

지상의 힘없는 나라는 그 나라가 주창하는 정의와 함께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짓밟힌다. 강자에 짓밟힌 나라는 역사의 기억에서 잊히며 기록에서는 곁다리(Outsider) 취급을 당한다. 한 번 짓밟히면 먼 훗날 땅속에서 발견되는 그 존재의 파편들이 씁쓸한 소회는 일으켜 놓을지언정 옛날로의 부활은 어렵다. 반면에 역사는 알렉산더나 시저, 칭키즈 칸과 같은 대정복자들을 영웅으로 기록한다. 그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때 피정복민들은 공포에 떨고 살상과 약탈을 당하는 참화를 입었을 것이지만 그들이 죽고 그들이 세운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역사는 그들을 혹독하게 심판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제(諸)민족이 생존투쟁을 벌이고 패권을 겨루는 검투장(劍鬪場)과 같다는 깊은 이치를 알고 산다면 정신이 모자라 강자에 짓밟히는 우(愚)는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한순간도 우리 땅에 대한 탐욕을 버린 일이 없는 동북아의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의 전략적 요충이다. 그렇기에 산업 강국들의 침략적 세력이 쇄도하는 것도 모르고 쇄국의 빗장을 걸고 후진 봉건 체제에 안주하다가 지도에서 나라 이름이 지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에 병탄 당했던 20세기 전반부 40년이 그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의 패전으로 주권이 찾아진 뒤로도 국토가 양단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 한반도의 지도가 여러 번 바뀌었다. 지도가 바뀌는 게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이고 이자정회(離者定會)다. 분열은 통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역사가 실증하는 변증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어이 통일을 이루어 지도를 한 번 더 바꾸어내야 한다. 우리가 대비를 잘해 전쟁을 막으면서 수완(手腕)을 발휘해 평화통일을 이루어내야 한다.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그의 시 인생찬가(A Psalm Of Life)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 시의 한 대목이 이렇다. ‘…이 넓은 세상의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露營) 안에서/ 말 못 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싸움터에의 영웅이 되라…(…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Be a hero in the strife…).’ 지금은 정치적인 국경의 의미가 사라진 시대다. 이른바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 롱펠로우가 읊은 것과 같이 ‘영웅’의 나라가 돼야 한다.

그렇다면 한미 FTA에 대해 폐쇄적이고 패배적인 반대만이 능사인가. 좁은 우리의 경제영토를 세계로 확장하고 경제 지도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가. FTA 통과를 저지한다며 국회에 최루탄을 뿌린 몬도가네 스타일의 정치인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대한제국의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정치인들은 일제가 나라를 먹어치울 때 그 옛날 그때처럼 패가 갈리어 싸움질만 하는지 우국 백면서생 야인의 마음이 답답하다. 태평양엔 격랑이 일고 강대국들은 시뻘건 눈으로 아시아로 몰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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