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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지만 울고 있는 감정노동자… 가치 인정하고 인식 개선해야

[천지일보=이솜 기자] ◆막무가내 고객에도 ‘죄송합니다’… 지친 감정노동자

“내가 돈 내고 화장 받겠다는데 왜 안 되느냐며 화내시는 분들이 많죠. 예약이 이미 찼다고 계속 설명해 드려도 ‘돈 낼 거다’ 이런 억지만 부리세요. 그래도 어떡해요.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죄송하다’라고 말할 수밖에요.”

A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권수연(여, 27) 씨는 “웃으면서 화장품을 선보이니깐 그걸 이용하는 손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손님과 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백화점 직원이나 텔레마케터, 승무원, 대형마트 직원처럼 속마음과 상관없이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라고 일컫는다.

감정노동자라는 개념은 미국의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가 1983년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이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했다. 혹실드는 이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육체·정신 노동 외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 감정노동을 하며 감정을 상품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서는 서비스산업이 급성장한 2000년대 즈음 감정노동자와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 개념이 알려졌다.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팅(직접 전화를 걸어 마케팅을 하는 형태)을 했었던 이수정(가명, 23, 여,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씨는 소위 고참이라고 불리는 옆자리 텔레마케터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그 언니는 진짜 감정이 없어요. 고객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옆자리까지 들리는데도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더니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또 콜하는 거에요. 보통 전화를 끊으면 한숨이라도 쉬는데. 나는 그렇게 되기는 싫거든요. 아무런 감정 없이, 녹음기처럼.” 그러나 이 씨는 이미 고객의 잘못된 행동에 상처가 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나한테 변태적인 숨소리를 뱉어낸 사람한테 상냥하게 ‘고객님’ 소리 붙여가면서 전화했던 걸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콜센터 텔레마케터 여성비정규직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 의하면 고객과의 통화에서 자주 감정을 억제하는가에 대해 노동자들의 답변은 5점인 ‘그렇다’에서 4점인 ‘거의 그렇다’에 가까웠다.

또한 작년 5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병원노동자들을 상대로 감정노동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 업무는 감정적 노력 업무’ ‘내 일은 웃거나 즐거운 표정’ ‘내 일은 솔직한 감정숨김’에 그렇다는 답변이 모두 80% 이상씩 차지했다.

◆보이지 않는 상처, 더 큰 후유증 일으켜

이렇듯 스스로도 감정 억제를 인지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들의 후유증은 심각한 수준이다.

전국 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서비스연맹)의 ‘민간 서비스 노동자 삶의 질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비스직 종사자 3096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후유증 실태를 조사한 결과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는 이들이 26.6%로 나타났다. 감정노동자 10명 중 2.7명이 우울증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은 “감정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할까 봐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이렇게 감정억제가 계속된다면 신체화(심리적 요인에 의해 내과적 이상 없이 다양한 신체 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질환)나 우울증‧불안장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가정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억압됐던 감정이 극단적 방법으로 표출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핸드폰(2009, 감독 이한민)’에서 주인공인 정이규(박용우)는 한 대형마트의 고객담당팀 주임이다. 정이규는 익명이 보장되는 상황이 되자 핸드폰으로 오승민(엄태웅)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이때 정이규는 고객에게 상처받았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등 감정노동으로 받았던 스트레스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해 결국 타인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후유증에도 회사나 정부에서는 감정노동자의 정신건강에 대한 뚜렷한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고객은 왕?…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존중해야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서 감정노동의 가치는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일까.

서비스연맹 이선호 교선차장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만연된 풍조가 가장 큰 이유”라며 “회사에서 하는 서비스교육도 한몫을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감정노동자들은 일명 ‘친절 교육’ ‘CS 교육’ 등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텔레마케터였던 이 씨는 “스크립트를 읽을 때 어떻게 해야 더 친절하게 들리는지 등의 교육을 받는다”며 “계속 고객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면 자신이 고객보다 낮은 존재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즉 자존감의 상실로 스스로가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하는 방안은 없을까. 

이 차장은 “요즘 감정수당 도입이 되고 있고 운동이나 상담 등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없애라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근본적 해결책으로 볼 수 없다”며 “먼저는 국민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자신이 존중받고 싶은 만큼 존중해 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들이 베푸는 상냥함에 친절로 갚아주는 부메랑의 원칙이 지켜지길 원할 뿐이다. “신기한 사실은 화를 내는 고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고맙다’라는 한 고객의 말로 그날의 힘든 것들이 눈 녹듯 없어진다는 거예요.” 오늘, 서비스를 제공한 감정노동자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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