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긋불긋 색색의 가을을 수놓은 운현당.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의 신분에서 왕도정치를 개혁하고 펼치기 위해, 12세 어린 나이의 아들을 고종으로 추대하고 10년간 섭정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뜻을 펼쳤던 곳으로, 그만큼 아끼고 가꾸었던 사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개혁정치 중심지… 고종 즉위 이후 규모 확장
궁궐같이 웅장했던 4대문 지금은 후문만 남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한국 근대사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그가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을 단행했던 장소이자 사저(私邸)로 사용했던 운현궁을 찾았다.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 지정돼 있으며, 철종 때 옛 관상감(조선시대 천문학과 지리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 있던 곳이다.

▲ 운현궁 내 노락당 내부. 안쪽 속방들이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개혁을 도모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결집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원군은 왕정을 펼치기 위해 어린 아들 명복(고종의 어렸을 때 이름)을 12세의 나이로 왕의 자리에 앉히고, 10년간 섭정했다.

지금 궁의 규모는 궁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편이다. 흥선군의 사저였을 당시에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운현궁 자리를 포함해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까지다. 이후 운현궁을 증축했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 리나 되고 4개의 대문은 궁궐을 보는 듯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지금은 후문만 남아 있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운현궁의 규모는 확장되고, 흥선대원군의 권력도 점차 막강해졌다. 경비병들의 처소였던 수직사의 규모를 보아도 으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수직사의 방 안에는 당시에 쓰던 화로 가구 호롱불 등 생활용품이 재현 전시돼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회갑연, 연례행사 등의 큰 행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됐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 했던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고종 3년(1886) 3월 21일 이곳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으며, 당시 가례행사를 위해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됐는데, 이들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으니 운현궁의 규모와 대원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운현궁 이로당에서 노락당 뒤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연결된 아치형의 문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 건물이다.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했던 곳으로,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됐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戚族, 성이 다른 일가)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다. 대원군이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 속방이다.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때 노안당의 상량문이 발견됐다. 상량문에는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는데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했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적혀 있다.

고종이 원년(1864) 9월 노락당과 노안당 준공 이후, 6년 만에 증축한 이로당은 정면 7간, 측면 7간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口’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여자들만의 공간으로 금남(禁男)지역이었다. 현재 이로당 우측 마당에서는 전통놀이 체험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한편 운현궁은 소유주 이청 씨가 1991년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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