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분홍빛 도포를 입은 이생강 선생이 대금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세화엔터테인먼트)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선생
대나무 악기로 감동 주는 음악인… “대금으로 세계 평정할 것”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 7월 27일 시끄럽게 퍼붓는 빗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금 소리가 건물 밖으로 흘러나온다. 대금을 부는 이는 젊은 여인이다. 그 앞에서 대금산조 연주의 대가 이생강(75) 선생이 열심히 듣고 장단을 맞춘다. 여자는 대금 부는 것을 잠시 멈추고 스승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곧이어 스승은 답을 하고 난 후 직접 대금을 연주한다. 그 순간 들리는 것은 이 선생의 대금 소리일 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대금을 모르는 사람도 선생의 소리가 명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이생강 선생은 전통 관악기, 특히 대금 연주자로 한평생 외길을 걸었다. 다섯 살 코흘리개 적부터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우리나라 악기를 배웠다. 단소, 피리, 태평소, 퉁소, 중금, 소금, 대금 등 관악기라면 다 불렀다. 대금은 관악기 중 제일 으뜸가는 악기다. 길이도 길지만 연주할 수 있는 폭이 넓다. 한마디로 무궁무진한 게 대금이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이생강 원형 대금산조’ 음반을 발표했다. 대금산조 음반이지만 정악대금으로 녹음했다.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 쓰이며, 산조(민속음악)에는 산조대금을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악대금으로 산조를 연주한 이번 음반은 국악계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궁중음악용 대금으로 민요 연주

“원형을 이어나가기 위해 음반을 냈지. 산조대금 창시자 박종기(1879~1939) 선생님께서 하셨던 원형을 재현했어. 그래야 국악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어? 국악이 발전되기 바라는 마음으로임했지.”

박종기 명인은 이생강 선생의 스승 한주환의 스승으로 대금산조를 창시했다. 대금산조는 주로 전통춤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대금은 정악대금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산조 역시 정악대금으로 연주했다. 초기의 대금산조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이번 음반을 제작한 그는 음반 제목에 ‘원형’을 붙였다.

“산조야말로 조선 후기의 민요이자 가요지. 백성 대부분이 불렀단 말이야. 그런데 오늘날 산조는 찬밥 신세야. 정악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산조는 어렵게 유지하고 있어. 그래도 국민 대다수가 듣고 외국에서 인기를 끄는 음악은 민속악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뭐니 뭐니 해도‘ 감동’이 최우선

이 선생의 예술 철학은 ‘감동’이다. 음악은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에 먼저 연주자와 관객이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국악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들으시오”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이 잘못됐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국악이든 클래식이든 퓨전이든 감동을 주지 않는 음악은 살아남을 수 없어. 생명이 없기 때문이야. 경쟁력 있는 음악은 어느 곳에 가든지 환영받아. 국악이 생존하는 방법? 국악을 많이 들려줘야지. 들어봐야 좋은지 나쁜지 느낄 거 아냐. 답답한 것은 국민이 국악을 들을 기회가 없다는 거야.”

경쟁을 해야 국악계가 살아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이 선생은 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을 몹시 아쉬워한다. 이어 “국제 교류를 일찍 시작했더라면 현재 한국이 상당히 발전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조선은 외국 문화를 몰랐지. 서양 문물을 일찍 수용한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고 36년간 지배했어. 이때 우리나라 음악이 많이 소멸됐어. 안타깝지.”

그는 음악인이기 전에 한국을 사랑하는 이다. 그래서 대금을 뛰어넘어 우리 음악을 알리는 데 온 힘을 다한다. 한국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고 대중에게 알리는 선생에게 삼성그룹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은 ‘우리 것을 아끼는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인즉슨, 이 회장이 ‘우리나라의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정신으로 동양방송(TBC)을 운영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골든아워(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대중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를 촬영한 방송이 송출됐다고 한다.

“(이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TBC는 우리 문화를 알리고 이해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 전통곡을 연주하는 이들은 최소 30분 정도 공연을 벌여야 했어. 실력이 있는 이들만 출연했지.”

그는 곧이어 국악이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로 ‘전통 음악 교육의 부재’를 꼽았다. 어릴 때부터 우리 음악을 많이 들려주면서 귀에 익숙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는 국악의 맥을 끊기 위해 서양 음악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서양 음악은 우아하고 훌륭하지만 국악은 천한 것’이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뿌리를 내렸다.

“국악 방송은 군사정권 시절에 설 자리를 잃었지. 국악 프로그램으로는 방송국들이 기업 광고를 수주하는 게 어렵잖아.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는 문화 사대주의가 만연했어.”

▲ 1960년 5월 프랑스 파리 세계민속음악제에 참가한 이생강(왼쪽) 선생 (사진제공: 세화엔터테인먼트)
◆60년대 파리서 국내 최초로 해외 공연

국악계의 상황은 어렵지만 그는 자신감에 차 있다. 대나무 악기 하나로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금 연주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큼 인정받고 있다. 최고의 명성을 얻기까지 그는 피땀 어린 노력을 해왔다.

“난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야. 대금으로 세계를 평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 우리 문화를 낮게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국악이 다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꾸준히 연주할 거야.”

1960년 4.19 직후 그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당시 에어프랑스 비행기에는 한국민속예술단 소속 무용수와 악사 등 33명이 탑승했다. 무용극 ‘춘향전’ 공연을 앞두고 주인공 안나영 무용수가 맹장수술을 하게 된 바람에 이 선생이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대금 연주를 했다. 급하게 꾸려진 무대가 국내 최초로 열린 민속악기 독주회였다. 이후 1968년 멕시코올림픽 참가공연을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아 50여 개국을 돌며 공연했다.

◆“국민이 찾는 국악 만들 것”

선생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아들(이광훈)과 함께 전국 초등학교에서 국악붐을 일으키고 있다. 아들은 제주에서 학생을, 그는 강원도 신철원에서 초등학생 700여 명에게 단소를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유아용 단소를 만들어 어릴 적부터 국악과 친해지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게다가 대금 음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음반을 꾸준히 내고 있다. 음반의 종류만 해도 약 500가지다. ‘동백아가씨’ ‘목포의 눈물’ 등 대중이 알 만한 노래를 대금으로 풀어냈다. 또한 부채춤, 승무, 농악 등 전통 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중이 대금 소리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선생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일상에서 국악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태교, 명상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그는 한숨도 돌리지 않고 학생을 가르쳤다. 국악을 알리는 데 일흔다섯이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언젠가 내가 세운 기록을 깨트릴 신진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국악계가 계속 발전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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