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장

▲ 우측 사진에 1930년대 숭실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이 있다. (사진제공: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해묵고 농익어 더 우러나는 詩
실천의 삶 따라 문학 전도사로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정서를 지녔던 민족시인 윤동주. 청년 윤동주는 언제나 소년의 마음으로 노래했다. 지금도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담긴 시와 문학들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있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 오르는 길’ 입새에는 마치 윤동주 시인의 깨끗함을 닮은 하얀 건물이 하나 있다. ‘윤동주 문학관’이다. 2000년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가 발족된 뒤 2009년 6월 언덕 오르는 길을 조성하면서 청운 수도가압장을 개조한 건물이다. 시인이 살던 생가의 우물 목판, 모교 의자, 등사기, 떡판 등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품과 윤동주 친필 원고 영인본 등 문학 자료가 여러 점 전시돼 있다.

▲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내부에 북간도 윤동주 생가에서 가지고 온 우물 목판이 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 겨울이 옴을 알리는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지난달 24일 이곳에서 박영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장을 만났다. 때마침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인왕산에서 떠 마셨다는 물을 받아오는 길이라던 박 회장의 입에는 연실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도 즐거울까. 바쁜 시간을 내어 준 박 회장에게서 윤동주 시인의 인생 한 편을 들어보기로 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박영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장
윤동주 시인은 단순한 시인이 아니다. 민족의 혼과 얼, 나아가 조국애를 삶 속에서 실천했다. 또 예술의 꽃인 한글문화에서도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시인의 시에는 삶 속에서 실천했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애정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6년에 가게 된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고 나서다. 생가가 있는 북간도는 겨레의 옛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삶이 아름다웠던 시인, 민족애를 실천했던 시인이 태어난 곳이 비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방치된 상태에서 비가 세고 담장은 이미 무너졌고, 학교도 없어진 상태였다. 현실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에 나라도 뛰어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박 회장은 당시 올림픽매달리스트전당의 사무총장 직을 맡고 있었다고 했다. 故 손기정 선생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연구하던 중 아버지 같이 모셨던 손 선생이 ‘(자신의)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도 좋고 기념사업 운동도 좋은데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라’던 말이 지금의 박 회장을 있게 했다. 그는 1998년도에 윤동주 생가를 확보하게 됐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 복원은 어떻게 진행됐나.

용정시 인민정부와 협약을 해서 50년 동안 빌리는 조건으로 땅 8천 평을 확보하게 됐다. 물론 연장도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이윤기 박사 주도로 1994년에 복원을 시켰다. 이때 쌓아져 있던 돌 더미에서 발견된 것이 (문학관에 전시된 우물을 가리키며) 저 우물이다.

우물을 둘러싸던 목판을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세관 심사에서 여러 번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생가를 방문했던 일행과 목판을 나눠서 들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웃음) 윤동주 시인은 이 우물에 비친 하늘과 자기 얼굴을 보면서 ‘자화상’이라는 명시를 떠올렸다.

-윤동주 시인의 시와 문학에 담긴 사상과 정신은 무엇인가.

시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에서 이미 동무들과 함께 동시를 썼을 정도로 문학 소년이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정신은 민족사랑과 평화사상이다. 또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사상을 실천한 분이다. 염치없다는 말은 부끄럽다는 말이다. 그 마음과 순수한 감각으로 시를 노래했던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항상 소년 같고 소녀 같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민족사랑,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침략자에 대한 저항정신이다. 시인은 그 저항정신을 시 속에 평화적으로 나타냈다. 용서와 사랑을 담아 온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어 박 회장은 “시인의 시는 가면 갈수록 해묵고 농익어 한약처럼 더 우러난다”며 “영화 연극 소설 뮤지컬 등 윤동주 시인을 조명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비췄다.

윤동주 시인이 1941년도 유작인 ‘서시’ ‘별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등 유명한 시상을 떠올린 언덕을 지키는 박 회장은 여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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