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 우국지사였다.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 초나라 회왕(懷王)을 도와 공을 많이 세웠으나 참소를 당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회사부(懷沙賦)를 읊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초사(楚辭)에 수록된 25편 중 ‘이소’ ‘천문’ ‘구장’이 남아 있다.

굴원은 왕족으로 일찍부터 회왕의 좌도(보좌관)로 임명되었다. 그는 학문이 높고 식견이 뛰어나 정치가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쌓았다. 궁중에서 왕의 상담역을 맡아 나랏일을 도모하고 외교면에서도 빈객의 접대와 제후들을 만나 솜씨를 발휘하여 초왕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굴원은 오로지 나라와 왕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다. 그의 신임과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 중신들 중에서 시기하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중에 상관 대부는 굴원을 없앨 기회를 틈틈이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굴원은 왕으로부터 법령의 초안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초안이 거의 완성될 무렵 상관 대부가 찾아와서 초안을 강제로 왕에게 가져가려고 했다. 굴원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왕에게 가서 굴원을 헐뜯었다. “왕께서는 법령을 작성할 때 언제나 굴원에게 명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법령이 공포될 때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왕은 내가 없으면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하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 말을 들은 회왕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 뒤부터는 굴원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굴원은 몹시 화가 났다. 진상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왕은 간신들의 모략중상이나 아첨을 받아들이고 신하들의 바른 건의에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다. 간신들이 나랏일을 독점하자 나라의 국운이 차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왕으로부터 멀어지자 굴원은 우울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때의 우울한 심경을 시로 남겼는데, 그 시가 유명한 이소(離騷)이다.
하늘은 사람의 시초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라고 한다.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자기를 낳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다. 지치게 되면 하늘을 우러러보고 싶어지고, 비통이 극에 달했을 때는 누구나 부모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굴원은 성심성의껏 왕에게 봉사했으나 간신들의 이간책으로 멀리 내침을 당했다. ‘이소’의 시는 굴원이 우울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었다.

굴원은 자신의 시에서 제나라 곡을 찬양하고 은나라 탕왕, 주나라의 무왕, 제나라 환공의 업적을 노래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려 한 것이다. 거기에는 숭고한 도덕과 정치의 큰 길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함축성이 있으며 그의 순수한 마음과 깨끗하고 정직한 행위를 읽을 수 있다. 문장은 짧아도 말하고자 하는 뜻은 커서 고매한 이상이 잘 우러나고 있다. 고결한 문장은 그가 죽어서도 세상의 어지러움 때문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랜 세월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굴원의 글은 흙탕물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마치 매미가 껍질에서 벗어나듯 빠져나와 진흙탕의 세계를 뒤로하고 하늘 저쪽의 변하지 않는, 의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굴원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굴원이야말로 이 세상의 더러움에 젖지 않고 자신의 깨끗함을 끝내 지킨 사람이다.

왕에게서 멀어진 굴원을 왕이 제나라 사신으로 보내었다. 굴원이 제나라에 머물고 있을 동안 위나라의 유세객 장의(張儀)가 초나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귀국한 굴원이 그 사실을 알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장의를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회왕을 꾸짖었다. 회왕이 몹시 후회하고 장의를 추격해 잡아 오라고 군사를 보냈으나 그는 이미 외국으로 떠난 뒤였다.
얼마 뒤 제후들이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는 대항했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장군 장말까지 전사하자 진나라 소왕은 때를 놓치지 않고 회왕에게 진나라 방문을 요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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