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은 됐으나 한국에 돌아온 것은 자주독립의 기회가 아니었다. 도리어 남북분단의 비극이 찾아왔다.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각각 진주해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게 된 것이다.

소련은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지고 승전국 미국이 긴 전쟁으로 탈진해 있는 틈을 타 일제가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에 약삭빠르게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는 파죽지세로 한반도에 점령군을 투입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소련의 독자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흑해 연안 도시 얄타에 모여 쑥덕거린 비밀 흥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 회담에서 우리 땅덩어리의 반쪽인 북녘땅이 소련에 대일 참전의 대가로 주어졌다.

소련군은 북한 주둔군 총사령관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그는 휘하에 김일성 등 그들이 기른 일단의 소련 공산당 앞잡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잽싸게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공세적인 군사력을 구축해나갔다. 소수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인민정권은 인민의 자유와 이념의 다양성은 추호도 허용하지 않는 일사불란한 공산주의 정권이었다.

반면에 남쪽의 해방공간은 혼란과 혼돈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의 나라인 미국의 군인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정치하에서 공산당은 합법이었다. 남한의 공산당은 소련이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회수한 구(舊) 화폐를 공급받아 자금력이 넉넉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위폐를 찍어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 장군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의 미․영․소 세 나라 외상(外相)회담의 결의에 충실하고, 되지도 않을 미소공동위원회에 집착하는 알쏭달쏭하고 우유부단한 리더십으로 일관해 혼란을 부추겼다. 더구나 북한과 달리 남한에는 통치 권력의 등장이 지연되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거기에 공산당을 비롯한 좌우 또는 중간파의 정당이 수도 없이 난립하고 정치지도자들은 반목과 불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은 상황은 스탈린니즘(Stalinism)의 전사들이며 평양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더 바랄 것 없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그때가 그들이 남한에서 구가한 공산주의자들의 최고의 호시절이며 절정기다.

하지만 남쪽의 해방공간에서 날뛰던 그들의 준동은 해방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유엔의 결의에 의해 한국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가까스로 끝이 났다. 유엔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려 했지만 북이 38선을 봉쇄해 유엔 대표단의 입북(入北)을 저지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유엔 대표단의 감시하에 남한 지역만의 선거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 남쪽은 북쪽도 차후 어느 날인가에 역시 유엔 감시하의 선거로 인민의 대표를 뽑아 통일 정부의 수립에 합류할 날을 기다려왔지만 아직도 그날은 오지 않고 있다.

그런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뒤늦은 그쯤에서라도 한국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불화한 하지의 무능한 리더십으로 보아 그 혼란이 남한을 김일성 정권의 붉은색으로 채색시켜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찔한 가정을 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구는 사석에서는 호형호제하며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시절부터 한국 정부 수립 직전까지 손발을 맞추고 의기투합해 비교적 잘 지내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노선을 달리한다. 김구는 김일성이 제의한 북과의 합작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정치협상이 끝날 때까지 남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에 반대했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분단을 고착화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는 김일성과의 회담을 위해 38선을 넘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남북 정치 협상을 제의한 김일성의 의도는 남한지역의 선거 방해와 사회분열을 꾀하려는 데 있었다. 이승만이 예견한 대로 자유 자주 통일 정부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안고 평양에 간 김구는 그 같은 김일성의 엉뚱한 의도에 이용만 당했다.
1948년 2월 21일 김구는 남한 지역 총선거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선생께서는 수개월 전에 말씀하기를 이승만 박사와의 관계는 남산의 소나무가 변하면 변했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꼬집어 물었다.

이에 대해 김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우리들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국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기자회견에서 오고 간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은 이승만은 ‘한국의 소나무가 모두 시들어가고 있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해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절개와 의리로 생애를 일관했던 그들이 갈라짐은 그들의 큰 과오였다. 뿐만 아니라 각기 구름 같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민족 지도자들이었기에 민(民)을 분열시키고 혼란 속에 몰아넣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해방 공간에서의 그들의 결별은 당시에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지금의 혹심한 사회 갈등과 대립, 분열은 그들이 그때 뿌린 불화의 씨앗과 인과율(因果律)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들어 시든다. 시든 잎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바람이 불면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이럴 때 숲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은 여전히 짙푸른 소나무다. 날씨가 추워져 봐야 시들지 않는 소나무의 진가를 안다. 소나무는 5천 년 우리 역사를 지켜온 증인이며 민족의 나무다. 그것은 변함없는 충절과 절개, 의리를 상징한다.

사육신(死六臣) 성삼문은 세조의 친국(親鞫)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죽어 봉래산 제 일봉의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겠다’고 했다. 제주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는 벼슬이 떨어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염량세태(炎凉世態)에도 끝까지 자신을 챙기는 제자이며 역관인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주었다.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뜻의 그림과 글이다. 생육신(生六臣) 김시습은 어린 소나무를 뜰에 옮겨 심어 그것이 백자나 되게 자랐을 때 이렇게 시를 읊었다. ‘…낮과 밤으로 학 우는 소리를 듣네/ 얼마쯤 더 크면 복령(茯笭)이 생겨 임금께 바치게 될까/…/ 복령은 생기지 않더라도 날이 차면 그 모습 역시 보기 좋을 테지(歲寒姿亦善)’라 했다. 이만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태에 산에 올라가 단풍 감상에만 빠지지 말고 김시습이 말하는 푸른 소나무의 모습, 이승만과 김구의 의리를 말해주었던 소나무, 불사이군의 충신과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에 의미 깊은 눈길을 줄 만하지 않은가. 소나무에는 우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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