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유학생활강윤은 공주 만세시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되자 건축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영명학교 윌리엄스 교장의 권고와 추천으로 택하게 된 길이었다. 강윤은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琵琶湖)의 동쪽 연안에 있는 상업도시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 도착하여 보리스 선교사와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보리스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밑바닥부터 실무를 배우고 저녁에는 두부나 떡을 팔아 학비를 벌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일
글·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학잡지다.1966년 1월 15일 창간했는데, 그보다 11년 먼저인 1955년에 발행된 월간 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필자는 1966년 창간호부터 1980년 통권 56호로 강제 폐간될 때까지 56책 완질과 1985년 부정기 1호, 1987년 부정기 간행물, 1988년 3월 1일에 나온 통권 59호(복간호)를 전부 소장했다. 여기에 그들을 아울러 서지학적으로 소개한다.제호: 발행일: 1966년 1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양평군의 고구려 역사 경기도 양평 땅은 고구려시대 양근군(楊根郡) 또는 항양군(恒陽郡)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 때 빈양(濱陽)이라고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빈양은 ‘바로 물가에 있는 산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판문점 휴전회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연락장교단은 10월 22일 지금의 휴전선 북방 800m 지점의 콩밭 옆에 초가집 3채와 주막을 겸한 가게 1채가 있는 널문리를 중심으로 직경 1㎞의 원형지역에 천막을 세워 회담 장소를 정하고, 그 위치를 지도 위에 표시하여 서로 교환하였다. 양측은 휴전회담이 결렬될 때를 대비하여 최종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휴전회담을 시작하였다. 양측은 회담을 압박하기 위해, 또한 휴전 시 한 치의 땅이라도
아카데미 4관왕 ‘기생충’ 봉준호“카페사람들 소음 들으며 작업”카페 분위기 무료로 즐기고 싶다면‘서울생각마루’가 안성맞춤한강 바라보며 머리 식힐 수도책 읽으며 생각 전환도 가능[천지일보=홍수영 기자] 최근 작품상을 포함한 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에 오르며 미국 아카데미를 휩쓴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직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는 항상 카페에서 글을 쓰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밝힌 바 있다.그는 왜 카페에서 글을 쓸까. 봉 감독은 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소감에서 그 이유에 대해 “카페 구석에서
글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영덕-영해 시위 양상 다르게 표출전국 약 1700건의 만세시위운동3.1운동 100주년 의미 되새겨야영덕군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영해군을 흡수했다. 영덕과 영해는 서로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두 지역은 같은 주체에 의해 같은 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도 지역사회의 배경 차이가 시위 양상을 다르게 표출시켰다.지품면의 예비 신학생 김세영영덕군 남부 지품면 낙평동의 김세영(金世榮, 30세)은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로서 평양신학교로 유학 가는 도중
미군 쓰던 가구 처분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 형성유럽풍 가구 많아… 디테일 살아있는 소품도 눈길[천지일보=박수란 기자] 햇볕은 살짝 뜨겁지만 시원한 바람 덕분에 완연한 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창문이 활짝 열린 테라스에서 햇살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날들이 이어진다.실제 이러한 풍경을 마주하고 싶다면 단연 이태원을 추천한다. 이태원의 낮은 비교적 여유롭고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외국인들과 골목골목 들어선 외국풍의 가게들, 빈티지함과 앤틱함이 느껴지는 상품들이 즐비하다.이태원에는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만큼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해야 할까. 아니다. 이제는 역사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달은 것을 전하면서 습득하는 일반인들이 늘고 있다. 이에 본지가 창간 8주년을 맞아 역사를 찾고 전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한다. 교직생활 후 자원봉사위인전 보며 역사에 빠져역사 깨달으려 답사여행[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깨뜨려서,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만큼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해야 할까. 아니다. 이제는 역사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달은 것을 전하면서 습득하는 일반인들이 늘고 있다. 이에 본지가 창간 8주년을 맞아 역사를 찾고 전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역사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한다. 초·중·고 특별활동에 편성역사에 흥미 없던 아이들"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우리나라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그리고 더욱 자랑스럽다.’ ‘나는
이대역 ‘염리동 소금길’을 걷다골목마다 아기자기 가게들 많아개성 넘치는 서점들 ‘지역 명소’[천지일보=손성환 기자] 서울 탐방에 나섰다. 이대역 5번 출구 ‘염리동 소금길’을 찾았다. 서울에 몇 안 남은 추억의 골목길이라고 한다. 이곳 일부는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철거에 들어가지만, 일부는 남아 있다. 특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초원서점’과 ‘퇴근길 책한잔’이다.염리동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리(鹽里), 소금마을이다. 옛날 한강 마포나루에 소금 배가 드나들던 시절 소금 장수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이렇게 불렸다. 지
“모두 들으세요, 긴급 공지사항! 지금 녹음작업이 문제가 아니에요. 여러분 주위에 미혼인 여자가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동생, 조카, 이웃집 아가씨, 다 좋습니다. 저한테 점쟁이가 빨리 귀인을 못 만나면 장가를 못 간다고 합니다.” “킥킥! 아니, 사장님은 그런 점쟁이 말을 믿으세요?”그가 심각한 어투로 말하는데도 당시 녹음실에 다니던 10여 명의 사람들은 농담인 줄로만 알고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그들이 소개하는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모두가 시원찮았
한한국은 한석봉의 후예로 8세 때부터 붓글씨를 배워 호남의 각종 서예대회를 휩쓴 서예 신동이었다. ‘한국’이란 이름 때문에 동무들의 놀림과 선생님의 지나친 기대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한한국은 서예가 아닌 서도를 배우면서 성숙해 갔다. 청소년 자살이 많은 요즘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줄 멘토가 있어야 한다. 김연아, 박태환, 양학선 같은 세계적 선수는 조기교육의 산물이다. 그들 뒤에는 가족의 헌신과 본인의 피땀 어린 자기주도적 노력이 있었다. 한한국의 탄생으로 5남 3녀의 자식풍년이 든 그의 집은 가난의 무게가 더해졌다. 그런
김종식 광주광역시 서구청장 “지게를 지든 공부를 하든 하나는 열심히 해야 한다” 저는 영암 월출산 밑에서 이십 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정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광주 서중학교 시험을 봤으나 떨어지고, 광주고등학교와 동계인 동중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광주고등학교가 아닌 광주일고를 나오는 등, 학교 다닐 때부터 모든 일을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 저의 어머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어머님은
꽃을 유난히 좋아하던… 포근했던 엄마 그리워 나의 어머니는 ‘바를 정(正)’자를 참 좋아하셨기에 우리 집 가훈은 ‘正’이었다. 신발 정리도 가지런히, 옷장에 옷도 상, 하, 속옷, 양말 따로따로 가지런히 책상위의 책도, 행동도, 말도, 걸음걸이도 반듯해야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 윗사람에 대한 예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이 모든 것이 몸에 배도록 교훈을 심어 주셨던 어머니. 그 옛날 핸드폰, 전화가 없었던 때 나와 어머니의 소통은 문에 바르는 종잇조각에 할 말씀을 써서 밥풀로 벽에 붙여놓는 게 지금으로 말하면 소통이었다. 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