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화성의 융건릉에는 두 개의 합장릉이 있는데 추존 장조(사도세자)·헌경왕후(혜경궁)의 ‘융릉’과, 아들 정조·효의왕후의 ‘건릉’이다.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가 9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고 7년이 지나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왕실의 경사였다. 세자 또한 아들을 보니 정조였다. 그러나 세자는 1762년 윤5월 임오화변으로 27세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다. 영조는 사도세자라 칭했고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 묘를 조성하고 수은묘(垂恩墓)라 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해 아버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파주 삼릉의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큰아들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쌍릉이다. 세종(英陵)과 효종(寧陵)의 능도 영릉이다. 영조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후궁 정빈(이씨)이 효장세자(추존 진종)를, 영빈(이씨)이 사도세자(추존 장조)를 낳았다. 영조는 왕자(연잉군)시절 부인 서씨가 27세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던 차에 1719년 후궁 정빈에게서 아들(효장세자)을 보았다. 이듬해 경종이 왕이 됐으나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니 영조가 왕이 되었고 그 아들은 세자가 됐다. 그러나 9살
글·사진 이제철 풍산화동양행 대표 속리산, 내장산, 경주 기념주화(2019년)한국은행은 우리나라 자연환경의 아름다움과 생태 보전의 미래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는데 2017년 ‘지리산’ ‘북한산’을 시작으로 약 7개년에 걸쳐 발행할 계획을 수립하였다.2019년 세 번째 시리즈로 속리산, 내장산, 경주를 11월 14일에 발행하였다.▶ 속리산앞면 도안은 문장대와 정이품송을 묘사하였다. 문장대(1054m)는 속리산을 대표하는 고봉 중 하나로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운장대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3.1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으며,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은행은 그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과 함께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다. 은화Ⅰ: 3·1운동앞면 도안은 3.1정신상과 ‘독립선언서’를 통해 3.1운동의 독립정신을 표현하였다. 3.1정신상은 독립기념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추존 왕이 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이다.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선조의 5남이자 어머니 후궁 인빈 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19(광해군 11)년 정원군의 신분으로 세상을 뜨니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묻혔다. 1623년 아들 인조가 즉위하니 대원군이 됐다. 1626(인조 4)년에 부인 구씨(계운궁)가 세상을 뜨니 김포 육경원에 안장했고,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흥경원으로 명했다. 이듬해 육경원으로 옮겨 합치고 흥경원으로 통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시 동구릉의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첫 왕비 인열왕후가 1635년 김포 장릉에 묻히고 인조가 1645년에 승하하니 함께 합장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 12살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를 계비로 맞이했다. 29세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조씨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왕후, 대비와 대왕대비를 지냈고 1688(숙종 14)년에 세상을 뜨니 동구릉 휘릉에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태릉은 여느 왕후의 무덤과 달리 웅장할 뿐만 아니라 왕후의 무덤임에도 중국의 황제처럼 ‘태릉(泰陵)’의 묘호를 가졌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장경왕후의 곁에 있던 남편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이 그 곁에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 명종은 왕후를 태릉에 묻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인종, 명종 대를 거치며 27년간의 왕비와 8년의 수렴청정, 21년의 대비의 역할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는 전임 단경왕후나 장경왕후와 달리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비각이나 공덕비조차 없는 백성의 묘와 다르지 않다. 연산군은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황량한 벌판에 서야 했다. 왕비인 어머니가 사사된 왕실 최대의 비극을 안고 자랐다. 왕세자 신분이지만 따뜻한 칭찬이나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결손’이 훗날 큰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던 가. 연산군은 1506년 폐위되자 강화로 유배돼 3개월 만에 죽었다. 일반 묘에 묻혀 제대로 돌보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10년이 지나 부인 신씨가 청해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땅으로 옮겨졌다. 1537년 군부인 신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신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연산군은 조선 최 초로 재위 중인 왕과 왕비의 맏아들로 태어나 원자와 세자를 거쳤으니 단연 적통 중의 적통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창덕궁이 건립된 이후 ‘인정전’에서 조선왕 최초로 즉위하니 ‘어진 정치’를 실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간과의 불화, 무력으로 대신을 억누르며 어머니 폐비에 대한 복수심으 로 참극을 벌이며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후 죽음을 맞아 일반 묘에 묻혔으니 단종 에
글 사진 이제철 풍산화동양행 대표 ‘한국의 문화유산’ 시리즈 3차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와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채택하였으며, 이를 통해 신라와 백제 왕조의 찬란한 문화를 비교하여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앞면 도안은 경주 동궁과 월지(東宮과 月池)의 전경으로, 신라 문무왕 14(674)년 때 창건된 별궁과 인공 연못으로 왕자의 거처 및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80년에 복원되었다(사적 제18호).뒷면 도안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七佛庵 磨崖佛像群)으로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선릉+정릉)은 42기 조선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선릉은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정현왕후, 정릉은 아들 중종이 잠든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쳐 불을 질렀기에 시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왕으로 꼽힌다. 세조(조선 제7대 왕)는 성종을 “도량이 태조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고, 정조(조선 제22대 왕)는 “조선왕가의 성대한 시기를 만든 성군”이라 극찬했다. 성종은 3명의 왕비에 후궁이 14명이었다. 31명의 자식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오릉의 ‘창릉’은 예종(이황, 조선 제8대 왕, 1450~1469)과 안순왕후가 묻힌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형 덕종의 ‘경릉’이 세자의 무덤이었던 반면, 창릉은 서오릉 최초의 재위했던 왕의 능이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형제가 이웃하고 있다. 예종은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죽자 뒤를 이어 세자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는 17세에 아들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유학생활강윤은 공주 만세시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되자 건축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영명학교 윌리엄스 교장의 권고와 추천으로 택하게 된 길이었다. 강윤은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琵琶湖)의 동쪽 연안에 있는 상업도시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 도착하여 보리스 선교사와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보리스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밑바닥부터 실무를 배우고 저녁에는 두부나 떡을 팔아 학비를 벌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일
글 신현배옛날 고신씨의 나라에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다. 왕비는 건강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끔찍이 사랑했다. 시집갈 나이가 된 공주가 아름답고 건강한 것도 다 왕비를 닮아서라며, 왕비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할 정도였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왕비가 한밤중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곁에 누워 자던 임금이 비명을 듣고 깨어났다.“왕비, 무슨 일이오? 무서운 꿈을 꾸었소?”“귀, 귀가 아파요.”왕비는 쥐어짜듯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너무 아파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강윤(姜沇)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 이명 준석, 관옥)과 공주영명학교 동급생이며 1919년 4월 1일 공주 읍내의 만세시위 때 유우석과 함께 주도자로 참여하여 대통령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출생과 성장강윤(姜沇)은 1899년 4월 28일 충남 논산군 양촌면(陽村面) 인천리(仁川里)에서 부친 강창석(姜昌錫)과 모친 김말자(金末子)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크고 눈썹이 진하며 귓바퀴가 유난히 컸고, 어릴 때부터 영리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해인사 장경판전, 남한산성 기념주화 (2014년)한국은행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한국의 문화유산 시리즈’ 기념주화를 2013년 창덕궁, 수원화성, 한글 기념주화를 시작으로 4년간 4차에 걸쳐 발행하였다.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해인사 장경판전’ ‘남한산성’을 도안으로 우리나라 기념주화 최초로 원형 외에 사각형과 삼각형의 형태로 제작함으로써 주화 제조 신기술과 조형미의 조화를 도모하였다.원형은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잃어버린 고대역사 ‘내이미’ 지리지에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省米)라는 지명이 나온다. 한주(漢州, 지금의 서울)를 기록한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에 ‘內(-乙)買, 一云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1913년 11월 5일 진도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에 있었던 1년간 제자가 생겼다. 신문명과 신지식에 목마른 청년이었다. 손정도는 제자가 된 19살 허도종(許道宗)을 데리고 평양행 길을 떠났다. 도중에 서울에 들러 청년을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허도종은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평양 집에 도착했다. 1년 6개월 만이다. 부인은 손정도를 몰라봤다. 고문으로 몸과 얼굴이 몰라보게 상하여 있었던 거다. 그해 겨울 가족과 지내며 몸을 추슬렀다. 이듬해 19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목회자의 길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의 4년 과정을 마치고 제5회로 졸업한 손정도는 숭실대학에 입학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인 그는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가 1911년에야 서울 냉천동에 섰기 때문에, 그전에 운영했던 신학회(神學會)라는 이름의 목회 훈련과정을 해야 했다.신학회는 지원자들이 농한기에 서울, 평양, 인천 등지 교회를 한 번에 한 곳씩 옮겨가며 한두 달 합숙교육을 받았다. 그때는 한국사에 특이한 ‘사명의 시대’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