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3.1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으며, 3.1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은행은 그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과 함께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다. 은화Ⅰ: 3·1운동앞면 도안은 3.1정신상과 ‘독립선언서’를 통해 3.1운동의 독립정신을 표현하였다. 3.1정신상은 독립기념관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강윤(姜沇)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 이명 준석, 관옥)과 공주영명학교 동급생이며 1919년 4월 1일 공주 읍내의 만세시위 때 유우석과 함께 주도자로 참여하여 대통령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출생과 성장강윤(姜沇)은 1899년 4월 28일 충남 논산군 양촌면(陽村面) 인천리(仁川里)에서 부친 강창석(姜昌錫)과 모친 김말자(金末子)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크고 눈썹이 진하며 귓바퀴가 유난히 컸고, 어릴 때부터 영리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1913년 11월 5일 진도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에 있었던 1년간 제자가 생겼다. 신문명과 신지식에 목마른 청년이었다. 손정도는 제자가 된 19살 허도종(許道宗)을 데리고 평양행 길을 떠났다. 도중에 서울에 들러 청년을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허도종은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평양 집에 도착했다. 1년 6개월 만이다. 부인은 손정도를 몰라봤다. 고문으로 몸과 얼굴이 몰라보게 상하여 있었던 거다. 그해 겨울 가족과 지내며 몸을 추슬렀다. 이듬해 19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목회자의 길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의 4년 과정을 마치고 제5회로 졸업한 손정도는 숭실대학에 입학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인 그는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가 1911년에야 서울 냉천동에 섰기 때문에, 그전에 운영했던 신학회(神學會)라는 이름의 목회 훈련과정을 해야 했다.신학회는 지원자들이 농한기에 서울, 평양, 인천 등지 교회를 한 번에 한 곳씩 옮겨가며 한두 달 합숙교육을 받았다. 그때는 한국사에 특이한 ‘사명의 시대’였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열렬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1931년 2월 19일 오후 12시 중국 길림성 시내 동양병원에서 손정도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손정도는 목사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시정부의 통합자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정자였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추앙하고 흠모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장남은 손원일인데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의 52년 생애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만주라는 땅만주는 중국 동북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고자치구를 포함하는 지역이나 원래 동쪽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북쪽으로 아무르주, 하바롭스크 주변지역까지 포함한다. 비옥한 평원을 가진 만주는 역사적으로 그 경계와 지배세력이 정세에 따라 크게 변동을 겪어왔다.고대 만주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땅이었다. 만주는 한민족 5000년 역사의 3/4 기간 동안 역사무대였다. 중국 대륙에 진(秦, BC221~BC206)나라를 시작으로 전한(前漢, BC201~AD4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간도참변 홍범도가 독립군 봉오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일본군부는 그 한 달 전부터 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을 ‘청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간도 한인들은 독립군 무장투쟁을 강화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자 이 계획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 협력과 일본군의 진입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고된 노동과 준비의 시간(1911~1918)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분위기가 일변했다. 홍범도 같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당국의 감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일본을 자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911년 홍범도를 비롯한 이상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빼고, 생업을 장려한다는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러시아 당국의 압박 때문에 취한 고육책이었다. 홍범도도 ‘권업’에 나섰다. 1912년 가을, 동지들과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홍범도는 1868년 음력 8월 27일 평양 보통문(서문) 안 문열사 앞마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윤식(洪允植)은 머슴, 어머니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홍범도는 홀아버지 밑에서 동네 젖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평양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감사 박규수를 비롯한 관민의 분노를 사서 불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홍범도의 생애가 나라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해녀들의 항일운동 3.1운동 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조금 완화된 문화정치로 후퇴했다 하더라도 사찰과 통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력을 증강하여 더욱 주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 때문에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합법공간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부분의 운동이 거의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이에 적색농민조합운동, 적색노동조합운동 등으로 사회주의적 조직화와 지하화를 통해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혁명화하고자 하였으나 큰 변화를 가져오지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공산당 재건운동과 고경흠, 강문석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은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국제적 승인이 취소되어 해방될 때까지 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 재건운동에서 제주도 출신의 고경흠(高景欽)이 크게 활약했다. 고경흠은 1927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동경에서 이북만(李北滿) 등과 ‘제3전선사(戰線社)’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잡지 을 발행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FF) 동경지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사회주의 운동 3.1운동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질식해 가던 독립정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젊은이들은 만주로, 상해로 달려가 독립군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었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기념하며 결의를 재다짐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그 제한된 자유의 틈새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민족 언론이 출범했고 국어·국사 등의 국학운동과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3.1운동에 앞선 법정사 항일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어 서울 전역과 전국에 퍼져나갔다. 민족 최고 최대의 3.1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 5개월 12일 전에 제주도에서 법정사 항일투쟁이 일어났다. (*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불교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근대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바람이 먼저 부는 곳 지난 30년 동안 매년 평균 25.6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평균 3.1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2019년에는 20개의 태풍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이 7개나 되었다. (기상청, 태풍발생현황통계, 1981-2010 및 2019) 태풍이 불어올 때마다 뉴스에 제일 먼저 제주도가 이야기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태풍을 맞는다. 역사의 태풍도 비슷한 것 같다. 제주도는 목포에서 약 100㎞나 떨어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제주도는 삼다도(三多島). 돌, 바람, 여자가 많다. 돌과 바람이 많아서 척박한 땅이다. 오죽 땅이 척박했으면, 여성들이 바다에서 물질하며 삶을 개척해야 했을까. 제주의 독립운동사도 돌, 바람, 여자의 키워드로 풀어볼 수 있다. 필자는 불과 14년쯤 전에 처음 제주도에 갔는데, 그때 조천의 제주돌문화공원에 가보고는 깜짝 놀랐다. 육지에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생활용구, 건축부재들에 돌을 사용하여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돌문화공원을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만해 한용운 한용운은 불교 승려이고, 불교개혁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어릴 때 이름(아명)은 유천(裕天)이었다. 만해와 용운은 불교 이름인데 용운(龍雲)은 불교에 귀의한 제자들이 받는 불교 이름이며, 만해(卍海)는 승려의 아호이다. 그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던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동리 서당에서 공부했는데 고향 홍성은 조선 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거인에 대한 기억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선생이 중국 땅 기강에서 71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1919.4.10~4.25)으로서 임시정부 출범의 산파역할을 했고, 그 후에도 제12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령과 주석 등 수반을 여러 차례 지냈다. 그와 오래 고락을 함께한 동지인 조완구는 그의 장례 후에 쓴 글(, 1940년 4월)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선생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중일전쟁의 전세는 점점 중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커우와 광저우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는데 일제의 세력이 남하해 옴에 따라 궤이린(桂林)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수세에 몰린 중국 국민당은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중국의 항일전에 동원하고자 나섰다. 1938년 11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위원장이 김구를, 1939년 1월 6일에는 궤이린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