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본문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또 다른 보혜사’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누가 봐도 기존의 보혜사가 있기에 그가 아닌 다른 보혜사란 의미로 해석되며, 이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의 부탁에 의해 하나님이 보내는 보혜사로 정리가 된다. “…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성경이 알리고 있고 약속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이다. 그러함에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2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이 보낸 자를 욕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는 말씀처럼 엄연한 사실인데 어찌하겠는가.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만 봐도 하나님과의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9~20)”말씀을 왜 길 도(道)라 하는가. 신앙의 목적지인 천국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가기 위해선 이 말씀을 길로 삼아 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도라 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본문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새 하늘과 새 땅(新天新地)’! 우리는 신앙을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과 같이 하나님이 경(經)에 기록해 놓기를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해 놓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선지자와 성인들이 한결같이 약속해 놓은 것도 다르지 않다. 비근한 예로 조선의 유학자요 천문지리학자요 철학사상가요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 선생도 그의 대표적 저서인 격암유록을 통해 “送舊迎新 好時節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본문에서 강조하는 순종은 과연 뭘까. 그것은 ‘말씀 순종’이다. 무조건적 순종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귀 기울여 듣고 의도하는 바를 깨달아 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신앙인들이 믿는 것은 도대체 뭘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예수를 믿는 증거는 먼저 예수가 한 말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의 증거는 지키는 것이다. 예수가 한 말은 곧 약속이니, 그 약속을 믿고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6~9)”본문을 통해 이천 년 전 두 가지의 빛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바로 세례요한과 예수다. 그런데 진짜 참 빛은 예수이며 세례요한 본인은 다만 그 참 빛을 증거하러 왔을 뿐이라고 증거하며, 또 증거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참 빛 즉, 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하나님을 경외(敬畏, Fear Reverence)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함에 대해 공경과 두려움을 갖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이 곧 지식의 근본이라고 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을 경외 즉, 공경하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뭘까.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고 하신 바와 같이, 말씀하신 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는 말씀처럼, 이천 년 전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이어져온 부패한 육적 이스라엘시대는 끝내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는 말씀같이, 하나님이 보낸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이스라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시대적 사건을 놓고 역사는 ‘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 23:34)”그렇다. 예수님의 이 예언과 같이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님이 보낸 자를 핍박하는 역사가 있어왔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위 내용은 예수의 산상수훈 중에서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닌 적어도 예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왜 당시 제자들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하고 궁금증을 가져야 옳을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사 56:7)”이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는데 왜 교회에 나가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고 했을까.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예수님과 사마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기록으로나 구전(口傳)으로나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종말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 종말설은 분명한 허구요 거짓이다.지금까지에서 확인해 본 바와 같이 모든 종교의 결론이요 종파를 떠나 온 인류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 성서에 그 답이 있다.흔히 모든 종교를 대신해 유불선(儒彿仙)을 얘기한다. 유교의 공자는 노나라 때 한 시골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불교의 석가는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자로 태어났으니 곧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종교(宗敎)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시다. 따라서 종교의 뜻도 하나니 종교의 목적도 하나다. 그러나 종교를 낳으신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사람의 욕심을 쫓아 종교는 본질을 잃고 말았다.그렇다 할지라도 이천 년 전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할 시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라고 말하면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종교의 역사를 보면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온다고 했다. 아담의 시대가 가면 노아의 시대가 왔고 노아의 시대가 가면 아브라함의 시대가 왔다. 또 아브라함의 시대가 가니 초림 예수의 시대가 왔으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시대마다 한 시대를 끝내고 한 시대를 세워야 했던 이유는 뭔가. 그것은 부패했기 때문이며, 가는 시대를 멸해야 했던 이유는 부패한 시대로 인해 도래한 새 시대가 물들까 봐 염려해서다. 지나온 성경 육천 년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위 글은 2천 년 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앞장서 핍박하던 바리새파의 거목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권적으로 택함 받고 바울이 된 후, 갈라디아교회 형제들에게 보내는 서신 중 일부분이다.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단언하고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노아의 때’가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는 시대마다 때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위에 언급된 ‘인자가 임하는 때’가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누구나 자기의 종교가 있다. 석가를 믿든 예수를 믿든 종교의 자유 또한 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은 석가를 믿는다는 것은 석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한 말을 믿는다는 사실쯤은 알고 신앙을 해야 한다. 각기 종교마다 경전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
약 600년 만에 일어난 로마교황의 재임 중 자진사임 사태, 로마교황청 내 개혁 추진과정에서 베네딕토 16세 로마교황의 자진사임으로 비화된 이번 사태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사임 배경에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속속 드러나는 사임 배경에는 교황청 내부의 추악한 권력다툼과 함께 온갖 부정과 부패, 나아가 한몫한 것은 역시 ‘돈세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오늘날의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면죄부(免罪符,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죄를 면하는 대가로 돈을 받고 발행한 증명서) 등 중세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성경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종파를 떠나 왜 성경 읽기를 마다하지 않을까. 아마 성경 안에 종교의 근본 가치인 종교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목적은 구원과 영생이다. 이는 성경을 경서로 삼는 기독교인을 떠나 모든 인류가 함께 누려야 할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인지 모른다.결국 이 성경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며 길잡이가 된다. 따라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분의 뜻을 꼼꼼히 찾아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뜻을 읽어야 한다.흔히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읽고 또 믿고 있는 경서가 있다면 성경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그 성경을 이해하고 있을까. 그래서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는 말씀이 있는가 보다.그 오해의 대표적 예가 바로 ‘아담’이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격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아담을 인류의 조상이라고 믿는 데서부터 신앙은 종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곁길로 흐르기 시작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담은 결코 인류의 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