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최종적으로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회영(李會榮)은 1920년 3월 베이징(北京)의 거처가 있는 후루고원으로 다시 왔는데 그 이후 베이징 대학에 재학 중인 이정규(李正奎)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15회에서 소개하였듯 이정규가 이회영을 만난 이유는 “이상농촌(理想農村) 양타오촌 건설계획”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고 지도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의 과정에서 우당(友堂)은 이정규에게 아나키즘에 대하여 자세히 문의를 하였는데 사실 아나키즘에 대하여 이정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응집(金應集)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출감했으며, 5년 이후 1925년 3월 신흥우(申興雨)의 자택에서 이상재(李商在), 구자옥(具滋玉)을 포함해 기독교 유력 간부 9명이 모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가 결성됐다.이와 관련해 흥업구락부의 설립 취지가 표면상으론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민 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에게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는 비밀결사조직(秘密結社組織)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단체에 김응집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응집(金應集)은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敎師)로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했는데, 본 칼럼에서 배화 학당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배화학당은 1898(광무 2)년 10월 기독교 전파와 여성 교육을 목적으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캠벨 선교사가 당시 한성 인달방 고간동(현 종로구 내자동)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처음에 캐롤라이나 학당으로 설립했다. 그 이후 1910(융희 4)년 4월 2일 배화 학당으로 교명(校名)을 개칭했으며 6개월 후에 남궁억(南宮檍)이 교사로 부임했는데, 1918년 건강 문제로 학
김원길 국가상징물연구가1. 국가상징물은 ‘국가이미지 개선, 사회통합’ 등의 기능을 한다.국가의식 고취방안에는 ‘민족정신으로 일어나는 민족정기’ ‘역사·문화·사상 등이 스며들어 국민 합의로 이뤄지는 국가상징물’ 등이 있다. 세계 주요국가의 민족정신을 살펴보면 미국은 개척, 일본은 무사, 이스라엘은 회복, 유럽은 규범, 중국은 중화사상이다.우리나라는 ‘충효사상’으로 홍익인간의 이화세계로 ‘인간을 이롭게’하는 수평적 호혜사상이 충효예의 본질이다. 충효예는 국익 존중 본분의 ‘동방예의지국’으로 가정에서 ‘효’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예’의
금년 3.1절 제100주년 맞아 민족을 위한 희생과 나라사랑정신 본받고 교훈삼아 실천해야적폐청산 보다 먼저 친일청산을 우선 실천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민족역사를 바로 써야하며 애국선열의 숭고하고 고귀한 희생 빛바래지 않고 헛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관내 애국묘지 및 시설 참배하고 애국정신 본받고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 갖고 애국선열에 감사해야 하며, 정부는 3.1절 제100주년 후손들 부끄럽지 않게 친일적폐청산부터 먼저 실천해야 애국선열과 항일독립투사분들의 목숨 받치신 애국정신과 나라사랑정신을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정치권
정라곤 논설실장/시인‘역사 바로 세우기’는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펼쳐왔던 핵심 아이콘이었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돼 국민과 우리 사회에 잘못 알려진 나라 역사를 바로잡아 제대로 계승·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는 좋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정권을 잡은 권력층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역사는 조선시대 등 왕조시대의 정사들이 아니라 일제로부터 광복돼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발생한 일들에 대한 과거사이다. 지금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강력 주장했는가 하면 집권여
국립이천호국원 현충과 박종일다가오는 3월 1일은 3∙1운동 99주년을 기념하는 3∙1절이다. 3∙1운동은 일제에 항거해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우리 민중들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독립운동이다.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했으며, 마침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공포해 국권을 침탈했다. 이후 헌병 경찰을 통한 강압적인 무단 통
3·1운동 91주년을 맞는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올해는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선열들은 일찍이 이러한 미증유의 국망사태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표현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또한 올해 3월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달이기도 하다. 때문에 올해 3·1절은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오늘날 우리의 자세와 태도를 성찰하는 계기를 삼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生命)이요 교훈(敎訓)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 91년 전 오늘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이어 저들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날이다.그러면 왜 독립을 외쳐야만 했던가. 그것은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로잡혀야만 했던가. 그것은 무지 때문이었다. 그 무지는 다름 아닌 부정과 부패를 생산했고, 그 부정과 부패의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