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승 충효예문화운동본부 공동총재 효창공원의 본래 명칭은 효창원(孝昌園)이다. 조선왕조 제22대 정조(正祖)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와 어머니 의빈성씨(宜嬪成氏)의 무덤이 있는 효창묘(孝昌墓)에서 유래 했으며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왕가의 무덤을 경기도 서삼능으로 강제로 이장해 조선의 법통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다. 살아생전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본래 명칭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창원은 1921년 6월 숲
송병승 이봉창의사선양회 이사서울시 용산구 임정로(효창동)에 위치한 효창공원은 본래 효창원(孝昌園, 사적 제330호)에서 비롯됐다. 조선왕조 제22대왕 정조(正祖)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가 5세에 사망해 무덤인 효창묘를 칭했다.그후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성씨(成氏), 23대왕 순조(純祖)후궁 숙의박씨(朴氏), 숙의박씨의 첫 번째 소생 영온옹주 등이 이곳에 안장됐다. 1870년(26대왕 고종7)에 효창묘는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 혼성여단은 민족정기를 꺾기 위해 유람지로 만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서울시 효창공원의 3의사 묘역. 이곳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다. 백범 김구는 1946년에 3의사 유해를 봉환해 효창공원에 묻었다. 이 때 김구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 봉환에 대비해 가묘를 만들고 표석을 세웠다.“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금년 3월에 세운 ‘의사 안중근묘비’에는 “(전략)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중국 뤼순 감옥 인근에 매장되셨으나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해 빈 무덤으로 혼
채순희 충남동부보훈지청장독립기념관에서 5분여 거리에 석오 이동녕선생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나즈막한 뒷동산과 잘 어울리는 아담한 생가 앞에는 선생의 휘호석(山溜穿石)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휘호석 뒷면에는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열심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돼 있다. 조국독립을 이루기 위해 살다 가신 선생의 삶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마당에는 꿈에도 그리던 광복된 조국의 고향 집에 오셔서 즐거운 듯 회상에 잠긴 듯 벤치에 앉아계신 동상이 있다.생가 안내판을 중심으로 선생의 생
윤주 ㈔효창원 7위선열 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유방백세(遺芳百世), 빛나는 그 이름 후세에 길이 빛나리.”김구 선생이 효창공원 삼의사 묘소 묘단에 쓴 글이다. 해방 후 환국한 김구 선생은 당시 일본에 있는 박열 선생에게 일본 땅에서 순국한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발굴을 요청해 1946년 5월 15일 이분들의 유해를 봉환해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했다.이때 김구 선생은 삼의사 묘역에 한 개의 가묘를 더 만들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묘다. 비록 아직까지 그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그 유해를 찾길
용산구 아파트공사로 성장가 사라질 위기 막아야윤주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상임고문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여기저기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름도 없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많지만 공적이 저평가된 애국지사도 적지 않을 것이다.그중 대표적인 한 분이 이봉창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봉창 의사는 우리나라의 항일운동 역사상 유일하게 일왕을 직접 겨냥해 처단하려 했던 독립운동가다. 일제강점기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일본 도쿄 요요기 연병장
윤주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단법인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회원 10여명은 지난 5일 백정기 의사 순국 제81주기를맞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정기의사 묘전에서 조촐한 추모식을 거행했다. “조국이 독립되면 내 무덤에 꽃 한 송이만 꽃아 주기 바란다”는 백정기 의사의 유언을 되새기며 필자는 백 의사 묘전에 한 송이 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쳤다.1932년 4월 29 홍구공원,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윤봉길 의사를 떠올린다. 일본군은 일왕 생일과 상해점령을 축하하는 전승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이날
효창원 성지 팔봉산 이종래 산을 오른다한 주 쌓인 피로를 풀고정상에 올라 호연지기를 품어덕과 기상을 키우는 등산여기 한국인 누구나 다 올라야 할 산효창원 팔봉산이 있다산을 마주해 우측 중앙에 석오 봉이요좌측에 청사봉우측에 동암봉으로 3봉의 위용이 당당하다정면 중앙에 좌측부터안중근 의사봉 이봉창 의사봉윤봉길 의사봉 백정기 의사봉 4봉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며서편에 우뚝한 백범봉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본다이토록 8폭 병풍처럼 펼쳐진 선열의 묘소가저절로 이름 되어 8봉산이다민족사에 위대한 혼 얼 정신의 뿌리요 근거지하늘아래 명산 고봉들이 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 한 청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 한 청년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군중들 사이에 서있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들이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일본군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기 위해 훙커우공원을 찾은 날이다.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진 가운데
기축(己丑)년 한 해가 간다. 가는 해를 붙잡을 수는 없다. 이상하게도 단순히 한 해가 간다기보다 한 시대(時代)가 가고 있다는 생각은 무리한 생각일까. 모든 것이 혼탁하기 그지없고 순리는 사라지고 역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 역리의 세상 역시 한계를 보이는 혼돈의 극치가 작금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 끝, 즉 말세(末世之末)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한 해를 보내면서 희망을 잃을 필요가 없는 것은 끝은 끝을 위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요, 새로운 시작과 질서를 알리는 희망의
지난 8일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에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주최하는 ‘친일인명사전(전3권) 발간 국민 보고대회’가 열렸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64년이 지나 4389명의 친일행위자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거기에는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그들 후손 가운데 일부는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지 않도록 법적 싸움은 물론 많은 반대를 해 왔었다는 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해온 윤경로(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국민들에게 보고드린다는 형식으로 발간사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 추모 붐이 일고 있다. 안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뮤지컬 ‘영웅’이 다음 달 개막을 앞두고 있고 한 조간신문에는 그를 소재로 한 소설도 연재 중이다.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내년이 되면 아마도 각종 이벤트가 더 줄을 이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안 의사 재조명 열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심스러운 일이 최근 빚어졌다. 이미 보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의사님의 동상이 국회에 사실상 방치된 사건이다. 사단은 이렇다. 재중 사업가 이진학 씨는 2006년 1월 16일 중국 하얼빈 광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