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토끼는 뛰다 발이 아파 좀 쉬었다 가려나 보다. 그 뒤를 갑진년 청룡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힘찬 질주를 예고하고 나섰다.2023년과 2024년, 오늘 우리는 가고 오는 길목에 서 있다. 가는 것은 가야 하고 올 것은 와야 하니 만고불변의 이치로다.하지만 멈춰서야 하고 바통을 넘겨야 하는 지난해는 무슨 그리 억하심정(抑何心情)이 많던가. 우크라 지역엔 개전 후 최대 미사일 공방이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단 말인가. 중동(이스라엘-하마스)은 또 무슨 그리 억하심정이 크길래 서로 미사일 공방으로 무고한 민간인
우리 민족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야말로 자랑스럽고 위대하고 우수한 민족이었음은 익히 아는 바다.그러나 그 같은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입증할만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인식돼왔고 믿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그 증거가 없는 것이 오히려 증거가 된다는 역설적 논리도 있으니 전혀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역설적 논리 중 대표적 논리가 바로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한민족 문화 말살정책이다. 한민족의 우수성은 어쩌면 우리보다 이방인이 더 잘 알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했다는 증거가 되는 사례이기도
삼월, 이제 삼월도 몇 날이 남지 않았다. 삼월이 다 가기 전에 못다 한 노래가 있어 또다시 펜을 들었다. 우리 민족은 삼월 하면 왠지 습관처럼 그날이 생각난다.그날은 104년 전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병천 아우네 장터를 지나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고, 태극기 물결은 온 나라를 휘감던 바로 그때다.3.1독립운동, 이 3.1독립운동은 3.1정신에서 기인됐고, 그 정신은 진리(道義)와 자유와 자주와 독립과 평화와 인류 사랑이었다.이러한 3.1정신은 구한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적 상황에서 종교지도자 33인
지나간 역사는 그저 역사로 끝나는 게 아니다. 지나간 역사 속엔 오늘과 내일이 담겨 있기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닐까.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 아니 그 이상으로 들어봤음직한 괄목할만한 시(詩) 한 편을 소개해 볼까 한다.그 시 속엔 우리 민족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애환이 깃든 역사가 있고, 그 아픈 역사는 역사로만 끝나는 게 아니며 오늘날을 알리는 미래가 숨어있었다면 얼마나 믿을까.그 시는 바로 ‘동방(東方)의 등불’이며, 시를 쓴 시인은 인도(현재 방글라데시)의 ‘타고
약 9년 전, 지구촌 한쪽에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 기적과 같은 일은 바로 ‘민다나오 민간 평화협정’이다. 2014년 1월 24일, 필리핀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 마긴다나오 주 제너랄 산토스 시내 호텔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직 종파 간 종족 간 전쟁으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한 작은 거인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찾아간다. 그가 도착한 그곳은 긴 세월 서로 싸우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작은 거인(HWPL 대표)은 모인 참석자
해람 강대업(강원평화나눔센터 대표)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시국에 코로나 치료제 개발에 획기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4,000여 명의 완치자 혈장을 공여하겠다고 밝힌 ‘신천지 예수교회’ 관련 기사가 포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 기회에 지난 2월 코로나 방역에 대한 홍보와 인식 부족으로 인해 많은 확진 피해를 입은 ‘신천지 예수교회’ 집단감염을 둘러싼 각계의 반응들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을 성찰해 보고자 한다. 언론학에서 뉴스의 취사선택적 편집이나 은폐를 ‘게이트키핑’ 이론
2019년 12월, 기해년이 저문다. 흔히들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말한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는 의미다. 아니 더 나아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한 시대가 온다는 말이 더 맞을 듯 싶으니 그것이 송구영신의 참 뜻이며 의미이기 때문이다.말하고자 함은 2019년 12월, 그리고 고대하며 맞이하는 2020년, 이는 앞서 말한 송구영신의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는 것은 왜 가야 하고 오는 것은 왜 와야만 할까. 이 또한 사람의 뜻이라기보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의 섭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가야
한반도(韓半島),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반도국에 속한다. 반도국이란 지정학적으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해양에서 대륙으로 진출하기에 용이한 요충지로서 육대주 어느 나라든 역사적으로 늘 외세 내지 열강들의 관심의 대상이 돼 왔다. 반도국으로는 그리스, 로마, 발칸, 크림반도 등이 대표적이며 우리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 또한 이에 속한다. 이 반도국의 지난 역사를 보노라면 참으로 주변 열강들과의 끊이지 않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으며, 흥망성쇠의 갈림길에서 자의든 타의든 늘 숨 가쁘게 살아왔고 버텨왔고 때론 지배해 왔다. 그
문명(文明), 이 문명의 뜻을 보면 글월 문(文)에 밝을 명(明)으로 ‘글로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그 글은 이 세상의 글이 아닌 하늘의 글이 된다. 즉, 하늘의 뜻이며 하늘의 사상으로 온 세상을 밝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이 대목에서 문화(文化) 역시 글로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뜻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글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문화의 근본은 곧 ‘하늘 문화’다.인류는 거듭돼 온 문명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과 같이 질 높은 삶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질 높은 삶이란 이면적이며
인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것일까를 묻는 것이다. 창조주의 섭리 가운데 흘러가는 역사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분명 성서에는 모든 것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있다고 했다. 조선 중기 유학자이며 천문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서기동래(西氣東來)’라는 말을 미리 남겼다. 무슨 말인가. 서쪽에서 시작한 것이 동쪽으로 온다는 얘기며, 그 오는 때가 됐고 그 목적 또한 이루어지고 있지만 무엇이 오며 왜 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가 없으니 그야말로 역설이다.길고 긴 세월을 보내며 창조주의 기막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한국을 가리켜 ‘동방의 빛이 되리라’고 노래했다.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 창간 기념 특집호에 타고르의 시는 영문으로 실린다.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고 있던 한국을 왜 이렇게 바라본 것일까.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
동방은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왜 동방을 찾으려 하지 않는가. 이 동방에 관해선 약 6000년 전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동방의 에덴에 그 지으신 아담을 거기 두시고 다스리게 했다는 내용으로 성경은 시작된다.흔히 성경은 인류가 반드시 읽어야 할 베스트셀러라 칭하고 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왜 온 인류가 읽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아마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와 그 창조주의 섭리 나아가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늘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경서의 뜻을
‘격변의 한반도’, 현실의 한반도 상황을 가장 잘 어울리게 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세계는 이 작은 나라인 땅 끝 즉, 동방의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이 한반도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고 있다.지금까지 인류는 그저 살아온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섭리를 따라 시대마다 사조(思潮)를 낳고 역사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따라서 지난 역사와 그 시대를 풍미하게 했던 사조는 오늘을 있게 한 힘이며 나아가 증인이다.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도 눈앞의 것만 볼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세월은 무심히 흐르는 것인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한 분이시니 곧 창조주다. 오직 스스로 계시며 홀로 계신 분이기에 하나님이라 칭할까. 그가 지으신 세계는 우주만물이며 만유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어떤 사연으로 인해 지으신 만유 안에서 떠나가고 지금까지 들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러한 사연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남기고, 또 언젠가 다시 만유 안에 드시기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담아 놓은 것이 바로 유불선의 경서다. 그 경서를 통해 창조주의 사연과 계획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宗敎)다. 종교(으뜸의 가르침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전쟁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민족이기에 그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다. 굳이 6.25 동족상잔이 아니더라도 긴긴 세월 외세의 침략 속에 민족의 명맥을 이어온 민족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기막힌 역사와 함께 오늘이 있기에 우리는 순국선열을 향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묵념을 한다.19세기 제정러시아시대 톨스토이는 문호(文豪)라는 호칭을 받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부활’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등 명작을 후대에 남겼고, 그중 대표작은 역시 ‘
올해로 광복 71주년을 맞이했다. 매년 찾아오는 광복절, 우리는 광복과 광복절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먼저 광복절이란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날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라는 사전적 의미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나아가 ‘광복’이란 단어와 함께 혼용되고 있는 ‘해방’과 ‘독립’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혼용되고 있는 문제의 세 가지 단어는 우선 사전적 의미부터 서로 다르며, 그로인해 오해하고 있는 경향
3월이 오면 생명 희망 소망 같은 단어가 절로 생각난다. 특히 3월이 오면 만세소리와 함께 독립과 광복이라는 그날의 벅찬 감동이 오버랩 된다. 이는 97년 전 3월 1일 탑골(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날의 함성은 26년 후(1945) 8.15 광복을 가져다 준 시금석이 됐다. 그날의 함성은 잠자고 있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과 광복의 의지를 일깨운 무저항 평화운동이었다. 또 그날의 함성은 민족지도자 33人으로부터 시작됐으나 우리는 민족지도자라 하기 이전에 종교지도자 33인(기독교 16, 천도교
천지일보 공식 창간일은 2009년 9월 1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한 달 보름 전부터 종이신문발간과 함께 인터넷 ‘뉴스천지’를 준비해왔으며, 본지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이상면 본지 편집인이 동년 7월 13일자에 올린 ‘화해와 상생의 기치를 들고’ 제하의 칼럼을 통해 시사했다. ‘시대적 요구에 발 맞춰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는 일에 길잡이가 되자’고 제언했던 바 그 길은 좌(左)도 우(右)도, 진보도 보수도, 그 어떤 계층과 종단도 아닌 오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신문, 국민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게 해주는 신문, 이 지구촌에서 없어선
참으로 많은 사연을 담은 갑오년(甲午年) 청마는 을미년(乙未年) 청양에게 희망찬 새해를 안기고야 말았다. 광복 70주년이면서 분단 70주년이라는 기막힌 역사를 가진 민족이기에 새해는 그 어느 해보다 기대 만발하다. 광복이라 하지만 분단이라는 비애와 함께했기에 애초에 온전한 광복은 아니었다. 남과 북이 하나 될 때 비로소 광복이 올 것을 예단했을 뿐이며, 남과 북의 평화통일은 세계평화의 첩경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암울해 보이기만 한 남과 북의 관계, 나아가 통곡과 죽음의 소리로 아비규환이 된 세계, 그 어디를 봐도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시진핑 주석 방한 하루 전날 동해안에서 발사체를 날리며 불만을 표시한 북한이 이번 교황 방문에서도 어김없이 불만의 화약 냄새를 풍기며 무려 다섯 발의 발사체로 한반도의 평화를 협박했다. 대관절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불장난질은 그저 철없는 30대 미완의 지도자의 비상식으로 넘길 수도 있다. 왜? 북한이 저런다고 당장 대한민국의 안보를 뒤흔들어 놓을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 김정은은 왜 체제통일의 공포에 떨고 있는가? 이 점이 무척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