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통통 털어서 다줬어 /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 명월이 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이 좋구나 / 우리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지난 60년대 상영된 ‘비단이 장사 왕서방’이란 영화의 주제가다. ‘띵호와’란 무슨 뜻일까. ‘가장 좋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顶好’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이 노래가 유행하여 필자도 어린 시절 즐겁게 따라 부른 적이 있다.6.25 전후 시장통에서 대부분 중국 음식점을 한 화교들은 열심히 살았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윤치정(尹致定)은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로 촉망받았으며 1829(순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첫 관직생활(官職生活)을 시작하였다. 1834(순조 34)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로 선임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고,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선임되었다.이듬해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를 책봉할 때 가례도감도청(嘉禮都監都廳)에 선임되어 의식진행에 능력을 인정받고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1845(헌종 11)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중국은 역사가 오래됐고 한나라의 한고조 유방을 칭송하며 순수 한족들만이 중국을 지배했다는 허상들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산시성과 하남성 일대 당나라 수도 시안을 중심으로 황하강 상류지역을 토대로 제한된 범위에서만 사실상 오늘날 개념의 영토주권을 행사할 정도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보는 960만㎢의 강역은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1949년 10월 1일 이후의 영토, 영해, 영공일 뿐이다. 원래 중국역사에서도 보면 그렇게 크지 않았고 국경 개념도 없었기에 한족 중심의 과거 중국 영토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처럼 최고 존경의 대상으로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못했다.스승이 거느린 제자들을 가리켜 ‘문인(門人)’이라고 했다. 학문이 깊은 유학자들은 많은 문인을 거느렸다. 몇 안 되는 제자들을 가진 스승도 있었지만 명성을 얻으면 수백명 문인을 가진 이도 있었다.옛날 풍속에 ‘속수례(束脩禮)’란 것이 있었다. 처음 스승을 뵈러 갈 때 존경의 뜻으로 예물을 준비해 가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왕세자도 사부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는 속수례를 치렀다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정과(正果)는 과일이나 연근, 생강, 도라지, 감초 같은 약초를 조청이나 꿀에 졸인 한과다.‘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정과는 이름 난 나무열매와 아름다운 풀 열매를 꿀에 달여서 볶은 것으로, 가히 오래 두어도 되나니 중국에서는 밀전과(蜜煎果)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정과라 한다. 즙청까지 아울러 쓰는 것은 수정과라고 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궁에서 잔치 때 주로 연근·생강·산사육·동아·모과·도라지 등을 이용해 정과를 만들었고, 제례 시에는 특히 인삼정과를 올렸다.‘경국대전(經國大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는 1663(현종 4)년에 서강(西江)에 위치한 현석촌(玄石村)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남계(南溪) 이외의 또 다른 호(號)로 알려진 현석(玄石)이란 호의 유래가 현석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박세채가 현석촌으로 이거한 이듬해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66(현종 7)년에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1667(현종 8)년 여름에 표류(漂流)해 온 한인(漢人)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보낸 일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에게 서찰(書札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신라 대찰 황룡사는 아쉽게도 고려 고종 시기 몽고 침입 때 불타 소실됐다. 사학자들은 이 사찰이 동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이 사찰에는 신라 삼보(三寶) 중의 하나였던 금동 불상(장육상)과 목조9층탑이 있었는데 연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황룡사 터에는 당시 초석과 불상을 안치했던 깨진 석조물이 남아있다. 경주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만약 이 사찰이 지금 그대로 있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 당국이 황룡사 탑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지부진하다.대부분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축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홍합(紅蛤)은 익형아강 홍합목 홍합과에 속하는 조개로 일명 참담치, 동해부인(東海夫人), 해폐(海蜌), 희패(姬貝), 각채(殼菜), 주채(珠采), 열합이라고도 부른다.그리고 홍합보다 작은 것을 와룡자(瓦壟子)라고 한다. 홍합이라는 이름은 살의 색이 유난히 붉어서 붙여진 것이다.홍합의 학명은 Mytilus unguiculatus(Valenciennes, 1858)이며, 영어로는 Korean mussel, hard-shelled mussel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주로 잡히는 홍합은 학명 Mytilus corus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최근 대치동 학원가를 뒤흔든 마약 음료 사건이 발생해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마약이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과거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마약청정국이란 지위를 얻을 정도로 마약에 대해 어떤 국가보다도 철저하게 단속하고 차단했는데, 국제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마약류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이 약해지고 공권력도 무뎌지면서 마약이 확산되고 있다.역사적으로 보면 마약은 국가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중엽 영국과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하자는 척화파(斥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니 새로운 차원의 당쟁에 돌입하게 되었다.그러나 결국 인조(仁祖)가 척화파(斥和派)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돌변해 청태종(淸太宗)이 1636(인조 14)년 12월 2일 직접 군사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신호탄(信號彈)이 시작되었다.한편 청나라의 이런 기습적인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국왕들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 영조(英祖)였는데 52년동안 재위(在位)하였으며, 향년(享年) 83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했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42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승하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정조(正祖)가 동궁(東宮) 시절 여러차례에 걸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영조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결국 왕위를 계승하였듯이 인열왕후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한편 인열왕후가 승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충북도문화재위원이었을 때 청주시 북이면에 있는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 후손들이 묘소를 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민원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으로 척화론에 맞서 화의를 주장한 인물이다.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 행궁에서 한편은 화의를 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은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다. 항복문서를 작성한 최명길, 이를 어전에서 찢은 김상헌의 눈물겨운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리얼하게 재현되기도 했다.최명길의 묘소는 당대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감동젓은 곤쟁이를 소금과 오이에 절여서 만든 젓갈이다. 곤쟁이는 곤쟁이과에 속하는 작은 새우처럼 보이는 것으로 바다와 민물에서 산다. 맛이 무척 좋다고 하여 감동해(甘動醢) 혹은 감동해(甘同醢), 감동해(甘冬醢)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고사로 인해서 권정해(權停醢)·권정해(權精醢)·충정해(充貞醢)·노하해(蓾鰕醢)·백하해(白蝦醢)라고 부르기도 한다. 1832년(순조 32) 서장관(書狀官)으로 12월 1~19일까지 청나라를 다녀온 김경선(金景善 1788~1853)이 쓴 ‘연원직지(燕轅直指)’ 12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인류 역사를 한마디로 ‘도전과 응전’이라 정의했다. 이는 어쩌면 토인비의 생각을 넘어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걸어온 자연발생적 현상이라고도 봐진다. 다시 말해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지역과 인류가 살고 또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며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단과 몸부림이 작게는 다툼이며 크게는 패권 싸움이며 오늘날 동서 냉전을 넘어 신냉전 시대까지 이어져 왔다면 무리한 진단은 아닐 것 같다. 이와 같은 인류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지정학적 측면에서부터
이병진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위원 아Q정전(阿Q正傳)은 루쉰 필명을 가진 사람의 중편소설이다. 루쉰은 중국 근대문학의 창시자라고 칭송받는다. 55세에 죽기까지 32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다. 작가라면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1881~1936년 생애가 그의 작품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기에 당시 중국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중국은 강대국들에 의해 식민지가 될 백척간두의 처지였다. 그야말로 국가는 본연의 역할을 못했다. 민중의 삶은 피폐 일로였다. 그나마 1911년 신해혁명 쑨원 중심으로 근 300여년 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격안관화(隔岸觀火)는 강 건너 언덕에서 남의 집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싸움판에 직접 뛰어드는 것보다, 바깥에서 관망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이다. 다른 의미로는 냉정하게 객관적 현상을 분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도 당사자로서의 시각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다 건너 중국 산동의 깊은 산 속에서 청나라 황실의 후손을 만난 김에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되짚어본다. 파주 봉일천은 청과 조선의 군사적 충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몇 년 전 봄에 벗들과 산동을 찾았다. 마침 한식을 맞아 아성(亞聖) 맹자의 묘에 봉토작업을 하고 공묘와 태산을 거쳐 제남에서 산동대학과 이청조사당과 천불산을 둘러봤다. 임치로 이동해 제경공의 순마갱, 관중과 안영의 묘,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수레박물관, 제국박물관을 둘러봤다. 영걸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깊은 향기가 산천에 깊이 스며있었다. 춘추시대 산동에 있던 제(齊)와 노(魯) 두 나라를 생각한다. 제가 임치에 풍성한 역사적 유물을 남겼다면, 노의 본거지 곡부에는 공자의 유적뿐이다. 원시유학의 가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근세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 합병당한 이유는 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유교주의에만 집착해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관리들은 민을 수탈하는 세습악역을 자행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원수가 돼 이성을 잃은 싸움판을 벌였다. 황제가 된 고종은 가족 싸움에서 한쪽 편을 들지 못하고 우왕좌왕 무능하기만 했다. 명성황후 민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돼 비참하게 불태워진다. 역사는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기록한다. 궁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636(인조 14)년 8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朝廷)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대립됐다. 석호(石湖)의 부친 윤황(尹煌)은 척화의 주창자(主唱者)였으며 그 또한 척화를 주장하는 계차(啓箚)를 올렸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 이후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결국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문거는 병자호란 때 부친을 따라 어가(御駕)를 호종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