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우리나라와 중국이 원산지인 회화나무는 괴(槐)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됐다고 전해진다. 회화나무는 괴수(槐樹), 백괴(白槐), 출세수, 행복수, 옥수(玉樹), 양목(良木), 양화목으로도 불린다.또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라는 의미로 ‘학자수(學者樹)’라 하며, 영어 이름도 같은 의미인 ‘스칼러 트리(scholar tree)’다.반대로 일각에서는 아무 곳이나 이익이 있는 곳에는 가지를 뻗어대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대표하는 나무라는 해석을 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인(仁)’은 어질다는 뜻이다. ‘어질다’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마음이 너그럽고 모질지 않다는 말이다. 유교사회는 왜 ‘인’을 최고의 이상과 덕목으로 삼았을까.중국 한자의 연원을 집대성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인은 ‘인(人)’과 ‘이(二)’의 두 글자가 합쳐서 된 것이라고 했다. 사람(人)이 하늘(-)과 땅(_) 두(二) 이치를 알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 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은 ‘하늘의 도리’가 되는 것이다.성인 공자의 큰 사상도 바로 ‘인’에 대한 도달이었다. 배움의 최고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901년 1월에 주일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가 일본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1902년 5월에 고종은 한반도 분할에 대비해 평양에 궁전을 짓는 공사를 명하면서 내탕금 10만원을 내려보냈다. 평안도 백성들은 내탕금의 20배인 206만원을 공사비로 부담해 민생이 파탄났다.1903년 11월 평양에 태극전과 중화전이 완공돼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이 모셔졌다. 그런데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사는 중단됐다.엎친 데 덮친 것인가. 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함녕전, 중화전과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05년 9월 5일, 미국 사절단 80여명은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단장인 육군장관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동딸 앨리스 일행은 북경, 대한제국을 거쳐 일본 순방 일정을 계속했다.9월 19일 오후 7시에 앨리스 일행은 제물포에 도착했다. 모건 주한미국공사와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 그리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의 영접을 받은 앨리스 일행은 황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숙소인 정동의 미국 공사관까지 가는 길의 집들에는 미국과 대한제국 국
서은훤 행복플러스연구소 소장인터넷 서점에 접속을 하든, 쇼핑몰에 접속을 하든, 심지어 유튜브에 접속을 하든 빅데이터에 의한 추천이 이뤄진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지부조화를 가속화하는 것 같아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인지부조화란 우리 자신이 일관된 생각과 느낌, 태도를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미 결정한 생각이나 태도, 느낌과 충돌하면 사람들이 심리적인 갈등이나 불편함을 줄이고자 선택하는 조화롭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특정 정당을 지지할 경우,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선택을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미증유의 국난을 치른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자식 복이 많았다. 왕비 2명과 후궁 6명 사이에 모두 25명(왕자 14명, 공주 1명, 옹주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세종의 22명 보다 3명이나 더 많았다. 그런데 임금의 옹주 사랑은 특별했다고 한다.선조는 글씨를 잘 써 중국 사신까지도 이를 얻어가려고 했다. 선조는 궁체로 쓴 간찰을 딸들에게 수시로 보냈다. 선조 임금의 한글편지는 모두 옹주들에게 보낸 것으로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겨있다고 한다.시집을 가면 함께 살지 못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8월 29일에 한국은 일제에 강점됐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도 황실은 ‘한일 병합조약’ 제3조에 의거 예우를 받고 세비(歲費)도 받았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됐지만 대접을 받았다. 10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특별회계 세출예산 외에 이왕가(李王家)의 세비 금(金) 50만원(圓)을 지출했다(순종실록 부록 1910년 10월 10일).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이왕가에게 지급한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150만엔(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는 1752(영조 28)년 9월 22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 탄생했는데 휘(諱)는 산(祘)이며, 자(字)는 형운(亨運)이라 했다.이와 관련해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잉태할 때 사도세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이만수(李晩秀)가 찬(撰)한 정조 행장(行狀)의 일부를 인용한다.“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를 방문했다. 신소설 ‘혈의 누(血─淚』)’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인직은 28세인 1900년 2월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정치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고마쓰는 이 학교 국제법 교수였다.1903년에 이인직은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을 거부하고 미야코 신문사의 견습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 육군성 통역으로 들어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 이후 그는 1906년 2월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의 부친(父親)으로서 고종황제(高宗皇帝)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된 사도세자(思悼世子)는 1735(영조 11)년 1월 21일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영조(英祖)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사이에 탄생했다.이와 관련해 영조가 장남(長男)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잃은 이후 40세가 되던 해에 탄생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남달랐는데, 그러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사도세자는 어릴 때 총명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러한 사도세자가 경종(景宗)의 의문의 승하(昇遐)가 하나의 도화선(導火線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최근에 새로운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김응집(金應集)을 알게 됐는데, 본 칼럼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독립운동가를 발견하게 된 것인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5회에 걸쳐서 연재한다.거슬러 올라가서 1992년 종조부(從祖父) 박의서(朴義緖)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사한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돼 독립운동가 발굴 활동을 해 총 10인의 독립유공자 신청서(獨立有功者申請書)를 보훈처에 제출해 그중에서 2인이 독립유공자로 추서(追敍)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2021년은 의친왕(義親王)의 7남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선조는 안보 불감증왜적이 부산을 침탈한 지 5일째 되는 4월 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첫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그런데 박홍의 보고는 엉성했다.“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 차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 창덕궁 희정당 앞 매점이 빈청이었다.)에 모여 선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우리는 지금 코로나19와 전쟁 중이다. 임진왜란(1592∼1508) 7년 전쟁을 징비(懲毖)한다. 사실 임진왜란은 사전에 예고된 전쟁이었다. 우선 선조의 리더십이 문제였다.# 안일(安逸)임진왜란은 조선왕조 200년에 맞은 최대 국난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안일(安逸)해서였다.1591년 2월에 선조는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통신사를 만났다.정사 황윤길(서인):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부사 김성일(동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아재당(我在堂)에 이어서 규장각(奎章閣)이 종친부(宗親府)에 있게 된 내력에 대하여 소개하면 규장각의 출발은 정조(正祖) 대에 종부시(宗簿寺)에 걸려 있던 규장각이라는 숙종(肅宗) 어필(御筆) 편액(扁額)을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의 주합루(宙合樓)에 걸면서 시작됐다.규장각이 설립되기 전, 열성(列聖) 어제(御製), 어필(御筆) 등은 종부시에 봉안(奉安)되었기 때문에, 종부시는 송나라 용도각(龍圖閣)을 본받아 근시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규장각의 제도를 정할 때 종부시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종친부(宗親府)는 경복궁(景福宮) 동쪽 건춘문(建春門)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종(高宗) 재위 초반에 종친부가 중수되기는 했으나, 좀더 확대된 공간이 필요해 1866년(고종 3)부터 시작하여 1867년(고종 4) 사이에 302칸 규모로 중수했다.주요 건물로는 천한전(天漢殿)을 비롯하여 아재당(我在堂), 규장각(奎章閣), 장판각(藏板閣), 경근당(敬近堂), 옥첩당(玉牒堂), 이승당(貳丞堂) 등이 있었는데 각각의 건축물(建築物)을 소개한다.천한전은 사성문(四星門) 안쪽 북쪽 방향으로 56칸규모로 건립했는데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에 있는 정전이다. 조선왕조 한양에 제일먼저 건축된 이 궁전은 글자대로 ‘어진정치’를 펼치겠다는 조선왕조 의지가 서린 곳이다. 조선 초 임금들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선조는 이곳에서 머물다 의주로 피난을 갔다. 선조가 궁을 떠나자 민심이 불을 지른 곳도 바로 이 곳이다. 임진전쟁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일본군이 한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창덕궁이 화염에 싸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임금 되지 못하면 민심은 거역하게 된다. 임금이 ‘인정’을 버리면 민초는 분노하는 것이 역사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873년(고종 10) 명성왕후(明成王后)는 최익현(崔益鉉)에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퇴진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경복궁(景福宮) 중건 사업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던 점을 이용해 그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케 하고, 고종(高宗)도 22세로 친정할 때가 됐으니, 흥선대원군은 섭정(攝政)을 거두고 퇴진하라는 내용의 상소였다.이와 관련해 고종이 성년(成年)이 되자 계속 섭정할 명분을 잃은 흥선대원군은 결국 조정(朝廷)에서 물러나고 말았는데 국왕으로서 친정(親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본 칼럼은 비운(悲運)의 황제(皇帝) 고종(高宗)의 붕어(崩御) 100주년을 기억하면서 70평생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20회에 걸쳐서 연재한다.이와 관련해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조선왕조 제26대왕으로 즉위했으나 1897년(광무 1) 10월 12일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하면서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에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호칭을 고종으로 통일한다.고종황제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차남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의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인지 역사적인 배경을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노릇을 해왔는데 조선의 요구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잡아왔다. 대마도주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조총을 쳐다보지도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이 신무기는 일본 각지로 퍼져 기존의 전투 양상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780년(정조 4) 봄에 정재원(丁載遠)이 화순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예천군수로 옮겼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사암(俟菴)은 다시 예천으로 내려와 부친을 봉양하면서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했다.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재원이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탄핵으로 예천군수에서 물러나 마재로 귀향했다.1782년(정조 6) 정약용(丁若鏞)은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보름동안 머물면서 경의과의 과목을 공부했으며, 그 이듬해인 1783년(정조 7) 2월 순조의 왕세자 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에서 정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