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에 이러한 제안이 수용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성직자(聖職者)를 동행해 귀국(歸國)했다면 인조(仁祖)를 비롯한 조정(朝廷)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는 실로 역사적인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것은 조선에 천주교회(天主敎會)가 공식적으로 조직되기 139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그래서 아담 샬 신부가 성직자 동행 대신 신자 출신의 환관((宦官)과 궁녀(宮女)들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안타깝게도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불과 2개월만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강석기(姜碩期)의 본관(本貫)은 금천(衿川)이며 고려시대에 거란군을 크게 대파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으로서 그의 고조부(高祖父)는 사간(司諫)으로 재임 중에 연산군(燕山君)에게 직언하다가 귀양을 간 강숙돌(姜淑突)이었다.증조부(曾祖父)는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은 강뢰(姜賚)이며 조부(祖父)는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역임하였던 강유경(姜惟慶)이고 부친(父親)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던 강찬(姜燦)이었다.그런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이 가례(嘉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가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노론에게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이후 1800(정조 24)년 6월 13일에 정조의 등에 난 종기가 악화돼 의관(醫官)들이 처방했으나, 안타깝게도 회복하지 못했으며 결국 보름이 지난 6월 28일 조선(朝鮮)의 르네상스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조가 향년(享年) 49세를 일기(一期)로 승하(僧下)했다.그런데 정조가 의관들의 진료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되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직접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올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는 1752(영조 28)년 9월 22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 탄생했는데 휘(諱)는 산(祘)이며, 자(字)는 형운(亨運)이라 했다.이와 관련해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잉태할 때 사도세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이만수(李晩秀)가 찬(撰)한 정조 행장(行狀)의 일부를 인용한다.“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의 부친(父親)으로서 고종황제(高宗皇帝)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된 사도세자(思悼世子)는 1735(영조 11)년 1월 21일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영조(英祖)와 영빈이씨(映嬪李氏) 사이에 탄생했다.이와 관련해 영조가 장남(長男)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잃은 이후 40세가 되던 해에 탄생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남달랐는데, 그러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사도세자는 어릴 때 총명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러한 사도세자가 경종(景宗)의 의문의 승하(昇遐)가 하나의 도화선(導火線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우리는 지금 코로나19와 전쟁 중이다. 임진왜란(1592∼1508) 7년 전쟁을 징비(懲毖)한다. 사실 임진왜란은 사전에 예고된 전쟁이었다. 우선 선조의 리더십이 문제였다.# 안일(安逸)임진왜란은 조선왕조 200년에 맞은 최대 국난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안일(安逸)해서였다.1591년 2월에 선조는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통신사를 만났다.정사 황윤길(서인):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부사 김성일(동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07년(융희 1)에 발생한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순종황제가 즉위한 이후 그 해 11월 통감부에 의해 종친부가 폐지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이와 관련해 부지가 8천평이 넘었으며, 3백칸이 넘는 규모로서 경근당(敬近堂)을 비롯해 10여개의 건축물로 이뤄졌던 종친부가 폐지되고 그 기능이 규장각(奎章閣)으로 이관됐다.그 이후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해 국권을 완전히 잃게 되는 불행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그 이듬해인 1911년 이왕직(李王職) 도서과(圖書課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도발이 한반도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일간 경제 전쟁이 악화되는 차제에 중·러 조기경보 통제기, 전투기들이 한반도 영공을 침범, 연합훈련을 시도했다. 우리 전투기들이 출격, 경고사격을 해 물러났지만 자칫 확전으로 치달을 뻔했다. 또 북한은 유엔결의를 무시하고 신형 탄도미사일을 두 발이나 쐈다.그런데도 우리 군은 미사일을 추적하는데 실패 했다고 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통령과 정부는 제대로 대응했는지 국민적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청와대는 하루 늦게 NSC를 소집했지만 대통령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세월은 흘러 어느 덧 2015년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12월 3일에 몇년동안 조사는 중단했지만 마음속에서 그 존재여부가 궁금하게 생각됐던 석고각(石鼓閣)과 관련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구체적으로 장충단(獎忠壇) 공원(公園) 박문사(博文寺)터에 있었던 석고각이 1965년 창경원(昌慶苑)의 야외무대 설치계획에 의해 석고각을 해체하고 창경원으로 이전(移轉)해 1966년 야외무대로 사용했다.이와 관련해 정부에서 석고각을 이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창경원이 아니라 석고각이 본래 위치하고 있었던 소공동(小公洞) 석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본 칼럼은 비운(悲運)의 황제(皇帝) 고종(高宗)의 붕어(崩御) 100주년을 기억하면서 70평생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20회에 걸쳐서 연재한다.이와 관련해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조선왕조 제26대왕으로 즉위했으나 1897년(광무 1) 10월 12일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하면서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에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호칭을 고종으로 통일한다.고종황제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차남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의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인지 역사적인 배경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약용(丁若鏞)의 강력한 후원자라 할 수 있었던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사암(俟菴)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정조는 무슨 이유로 승하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를 자세히 소개한다.거슬러 올라가서 1800년(정조 24) 5월 30일 정조는 경연(經筵)에서 중요한 하교(下敎)를 내렸는데 오회연교(五晦筵敎)라고 불리는 이 경연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라. 그렇게 한다면 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 넣은 세력을 처벌하지는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고대에도 화재는 나라의 큰 고통이었다. 대부분 목조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민초들은 불이나면 모든 가산이 잿더미가 되어 유랑이나 걸식을 해야 했다. 신라 미추왕 원년 서라벌에 화재가 발생, 민가 백여채가 불탔다. 진평왕 18년 왕도에 큰 화재가 발생, 왕이 현장에 나가 이재민을 위로했다는 기사가 있다. 기록을 보면 고려, 조선 시대에도 화재가 많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현종 12년에는 개경에 화재가 발생, 2천여호가 전소되는 참사가 있었다. 충렬왕 2년에도 개경에서 불이 나 1천여호의 민가가 타 수
김기환 통일교육문화원 평화교육연구소장 2017년 정유년이 밝았다. 2016년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어려운 한 해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신병을 앓았고, 국가적으로는 난(難)이라 불릴 만큼 권력의 악취를 맡고 추함을 보았다. 다수의 국민들은 이에 저항했다. 인생이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결코 거창하거나 황홀할 필요는 없다. 우리네 어진 서민의 삶은, 비록 된장국에 조기 한 마리라도 편안하게 저녁상에 앉으면 족하다.정유년은 닭의 해다. 닭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지만, 새벽을 깨우는 것임에 틀
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궁궐 속 친잠례 흔적 알 수 있는 곳은?궁궐 속에서 친잠례의 흔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창덕궁 후원에 들어서면 가장 아름다운 공간인 사방형의 부용지 북측에 정조대왕 즉위년에 지은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 서편에 있는 서향각의 현판에서 궁중 친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어친잠실(御親蠶室)’, ‘친잠근민(親蠶勤民)’ 등의 현판은 친잠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서향각 어친잠실에서 여러 차례 친잠을 했으며, 서향각 현판 앞에서 친잠
왕과 왕비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던 창덕궁 후원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창덕궁의 후원은 지형을 자연스럽게 살려 조성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후원은 왕과 세자(세손)의 독서공간이자 휴식공간이며, 사냥과 활쏘기는 물론 무더위를 식히는 피서지이자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고 백성의 고충을 헤아리는 공간이기도 했다.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소요정(逍遙亭)과 취한정(翠寒亭 푸르고 시원한 정자), 어정(御井 왕이 드시던 우물), 옥류천 등이 있다. 청의정은 궁궐 안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조선의 최대관심사는 명종의 외아들 순회(順懷) 세자의 부인 덕빈 윤씨의 장례식과 시호에 관한 문제였다. 윤씨는 11살에 과부가 됐으며, 세자의 4촌 선조가 뜻밖에 왕이 됐다. 윤씨는 29년 동안 창경궁에서 부처님을 섬기다가 40세에 죽었다. 선조는 왕후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논쟁이 시작됐다. 의논이래야 상복착용과 참석의 범위, 제사상에 올릴 소와 양의 선택과 같은 문제였다. 시호를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망자에게 어울릴 두 글자를 정하기는 어려웠다. 유식한 신하들은 인(
신광철 한국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한·중·일이 비슷하지만, 근원적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창덕궁은 자연미의 보고다. 중국과 일본은 같은 인위적인 문화를 만들어낸다. 중국은 힘의 과시를 과장되게 표현한다. 높고, 크고, 화려하게,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 위압감을 가지게 한다. 일본은 정형미를 보여준다. 상하비례와 좌우대칭을 주축으로 한 일정한 원칙을 지키려는 의도가 강하다. 그래서 깔끔하고 정교하며 차가운 비장미가 흐른다.우리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우선 중국과 일본의 인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자연미가 주조
신광철 한국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동북아시아에서 비정형적인 궁궐로서는 으뜸가는 건축물이다. 바로 창덕궁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든 경우는 없을 듯하다.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안락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극대화한 왕궁은 없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인 인공미를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권력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 한 나라의 궁(宮)도 주인인 군주를 닮는다.결국, 한국인이 지은 건축물에는 한국인의 기질과 건축술이 그대로 담기기 마련이다. 어떤 건축물보다도 인공성의 절대치를 보여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