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맹자의 유적은 산동 고도 추성(鄒城)에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맹묘(孟廟), 맹부(孟府), 맹림(孟林)으로 규모와 형식을 갖췄다. 주건물인 아성전은 4번째 원락에 있다. 높이가 17미터나 되는 이 건물의 지붕은 녹색의 유리기와로 덮었다. 사방에는 명의 홍치(洪治) 시기에 세운 26개의 거대한 8각형의 돌기둥이 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석고는 송대의 유물로 연꽃을 뒤집은 모양이다. 전각 앞 회랑에 있는 8개의 돌기둥은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정문의 4개 기둥에는 구름 속에서 유유히 노니는 한 쌍의 용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하루 일정으로 방한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을 접견했다. 현직 미국 부통령이 한국을 찾은 것은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당시 마이크 펜스 부통령 방한 이후 4년 6개월 만이다. 이날 윤 대통령이 해리스 부통령을 접견한 것은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얼마 전 미국 뉴욕에서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짧은 만남이 우리에겐 너무도 아쉬웠다. 한·미 간에 중대한 현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가다가 만나서 나눈 짧은 대화는 우리 국민에게 상당한 실망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의 첫 달 탐사 궤도선 ‘다누리’의 발사가 성공하는 날 윤석열 대통령은 축하메시지를 발표했다. ‘다누리호가 달 탐사를 위한 130여일의 여정에 성공적으로 돌입했다’며 ‘우리 다누리호, 우리 대한민국 파이팅’이라고 기뻐했다. 그런데 이날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에 대한 직무수행평가는 참담하게 추락했다. ‘최순실 게이트’ 의혹 당시인 지난 2016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긍정 평가 25%(부정 평가 64%)보다 낮은 수치를 보였다. 직무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지난주 28%에서 24
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시민에게 완전 개방된 청와대를 최근 두 번 찾아가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첫 번째는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였다. 본관, 관저, 영빈관 등 주요 건물을 개방하지 않아서 야외공간 등만을 둘러봤다. 두 번째는 청와대 관저 등 내부 건물을 공개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두 번 모두 청와대가 거대한 ‘봉건왕조 건축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때 대한민국 권부의 상징으로서 외관상 위용은 대단해 보였지만 실용성은 전혀 없어 보였던 것이다. 어린이날 등 특별한 날이면 언론에 자주 공개
[천지일보=김누리 기자] “청년희망적금과 청년도약계좌 중에서 선택한다면 어떤 상품을 가입하실건가요?”“글쎄요, 둘 다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10년 만기의 도약계좌를 넣느니 제가 펀드를 찾아서 넣는 게 훨씬 이득이죠. 요즘 은행에서도 10년 상품 안 내놓잖아요.”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청년 자산 증식 공약으로 내건 ‘청년도약계좌(도약계좌)’에 대한 청년들의 반응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청년들의 목돈 마련을 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앞서 진행된 ‘청년희망적금(희망적금)’과 유사해 보이지만 2년 만기의 희망적금과 달리 10년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905년 11월 17일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 넘어서 끝났다. 잠시 후 하야시 공사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물었다.한규설은 ‘폐하께서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했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한 것이다.이러자 하야시가 질책하고 나섰다.“폐하가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조약을 순조롭게 진행해야지, 대신들이 모두 폐하의 명을 어기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05년 9월 5일, 미국 사절단 80여명은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단장인 육군장관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동딸 앨리스 일행은 북경, 대한제국을 거쳐 일본 순방 일정을 계속했다.9월 19일 오후 7시에 앨리스 일행은 제물포에 도착했다. 모건 주한미국공사와 부영사 윌라드 스트레이트 그리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의 영접을 받은 앨리스 일행은 황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숙소인 정동의 미국 공사관까지 가는 길의 집들에는 미국과 대한제국 국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그간 현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고위 인사들은 한미동맹에 대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자주 했다. 어느 나라든 정부와 여권 인사들이 어떤 이슈에 대해 표명한 견해를 그 윗선 나아가 대통령, 총리 등 정부 수반이 명시적으로 부인하거나 바로잡는 일이 없으면 대내외적으로 그 나라의 뜻이 그런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상식이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말과 정부 및 여권 인사의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현 정부의 한미동맹에 대한 견해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문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이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시해한 것이다.그런데 이 사건은 배후와 시해 과정·시해범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 데다가 일본이 사건을 철저히 인멸·왜곡했기 때문이다.먼저 을미사변 전야부터 살펴보자. 1895년 2월 일본군이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까지 위협하자 청나라 조정은 급히 이홍장을 시모노세키로 파견했다. 이홍장은 요리 집 춘범루에서 이토 총리와 교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신립의 오만4월 20일에 삼도순변사 신립은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선조를 접견했다. 선조는 보검을 내리면서 전교했다.“이일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이윽고 선조가 “왜적이 어떠냐?”고 물으니 신립은 왜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선조는 “변협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라고 말했다.신립이 나간 뒤에 선조는 “변협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이다. 내가 항상 그를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선조는 안보 불감증왜적이 부산을 침탈한 지 5일째 되는 4월 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첫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그런데 박홍의 보고는 엉성했다.“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 차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 창덕궁 희정당 앞 매점이 빈청이었다.)에 모여 선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역대 항주의 지방관들 가운데 고대의 이필(李泌), 백거이(白居易), 소동파(蘇東波), 양맹영(楊孟瑛), 완원(阮元)과 함께 근대의 임계(林啓)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임계는 복건성의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 청의 광서(光緖)2년(1876)에 진사가 됐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서태후가 해군의 경비를 전용하여 이화원을 짓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항주지부로 좌천됐다.항주는 절강의 성도로 관청이 많았기 때문에 부조리도 많이 발생했다. 신임지부임계는 가혹한 잡세를 일체 폐지하는 금령을 비석에 새겨 발표했다. 절대 변경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592년 4월 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1591년 3월, 일본을 다녀 온 조선통신사는 선조를 접견했다.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1590년 7월 22일에 교토에 도착해 11월 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1591년 1월에 귀국했다.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
박종윤 소설가조조는 진류 땅 재산가 위홍의 도움으로 황제의 조칙을 빙자해 각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우자 각지에서 근왕병을 지원하는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북평태수 공손찬은 근왕병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가던 중 뜻밖에 평원현에서 현령으로 있는 유현덕을 만나 잠시 쉬어가기 위해 동헌으로 들어갔다.현덕의 옆에 시립한 관우와 장비를 보자 공손찬이 궁금하여 현덕에게 물었다. “이쪽은 관우요, 저쪽은 장비입니다. 저와 함께 결의형제를 한 아우들입니다.”현덕은 말을 마치자 관우와 장비에게 공손찬에게 예를 올리라고 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보는 만큼 보인다.” - 르 코르뷔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에서 리졸리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그림을 보았다. 패널에 유화로 그린 작은 그림인데 두 손을 모으고 누구인가를 쳐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켜 본 증인(마가복음 15~16장)인 동시에, ‘참회의 성녀’로서 수많은 전설에 의해 덧씌워져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다. 특히 영화 ‘다빈치 코드’로 더 유명해졌다. 리졸리는 1508년에서 1549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 시기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또 다시 우리 특사단이 평양을 찾게 된다. 폼페이오의 4차 평양 방문이 좌절된 이 시점에서 우리 특사단의 사명은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반이고, 북한 비핵화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몫이 반인 숙명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이번 방북기간 중 우리 특사단은 북한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상대하게 될 것이다. 또 김정은 위원장의 진달래관 만찬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영철은 표면상 북한의 대외창구일 뿐 모든 결정은 김정은 위원장이 내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중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김여정 노동당 1부부장
정라곤 논설실장/시인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한달간 ‘옥탑방’ 생활을 마치고 시장 관사로 돌아갔다. 지난 6.13지방선거 공약에서 옥탑방살이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낸 셈이다. 지난 7월 22일 28억원의 시장관사를 두고 삼양동 옥탑방에 입주한 박원순 시장은 폭염이 신기록을 갈아치운 유난히 무더웠던 기간 동안 9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선풍기로 생활했으니 그만하면 서민생활을 많이도 경험했고 앞으로 서울시정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지난 19일 옥탑방에서 짐을 뺀 박 시장은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옥탑방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시
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는 북한의 발전을 위해 특별히 중국과 밀접한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 왔다. 북·중 정상회담이 바로 그 가운데 있어온 것이다. 북·중은 일제강점기와 국공(국민당·공산당) 내전 시기에는 동지였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 혈맹관계를 맺었다. 북·중간의 끈끈한 밀월관계는 1958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인민일보는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2016년 총선을 닷새 앞두고 국정원은 북한식당 종사원 12명과 지배인이 탈북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남한에 대한 동경이 생겨 자유의 나라로 온 20~30대 여성 종업원 12명과 남성 매니저 1명’이라고 밝혔다. 사건이 불거지자마자 북한은 국정원의 공작이고 유인 납치행각이라면서 송환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의례 하는 생트집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정원은 ‘탈북민들은 잘 살고 있다’ ‘탈북민들은 잊어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사람들은 ‘탈북민들’의 신변을 걱정했다.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번 중국 방문단의 북한 최고의 스타는 누구인가? 아마도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라는 데 별로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는 벌써 세 번째로 북한 언론에서 ‘여사’로 호칭됐다. 지난 2월 8일 북한군 정규군 창설 열병식장에 나타난 리설주를 향해 북한 언론은 최초로 여사 호칭을 사용했고, 대한민국 특사 일행 접견 시에도 여사, 그리고 이번 중국 방문이 그 세 번째이다. 북한에서 영부인을 향해 여사란 호칭을 쓴 것은 1974년이 마지막이다. 그 전까지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를 지칭해 ‘존경하는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