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동아예술전문학교 예술학부 교수)“TV 틀면 나온다.” “채널 돌려도 같은 인물이다.”전현무, 붐, 장도연, 김성주, 박나래, 김구라, 김숙, 신동엽 등 일부 소수 방송인의 예능 프로그램 독식이 가중되고 있다.콘텐츠 화제성을 조사하는 한 업체는 지난해 방영된 비드라마 프로그램 431편을 대상으로 8319명의 출연자를 분석한 결과, 일부 방송인들의 돌려막기식 예능 독식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방송인 전현무가 지난해 21편이나 되는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MC로 출연했다는 점은 전형적인 ‘예능 독식’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세필(金世弼)은 1520(중종 15)년 3월 명나라에서 사신(使臣)의 임무(任務)를 마치고 귀국하였으며 4월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된 지 1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그런데 그해 9월에 김세필이 특진관(特進官)으로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중종(中宗)에게 진언(進言)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는데 당시의 정황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김세필의 신도비를 인용한다.“전하(殿下)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접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당우(唐虞)의 치도(治道)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세필(金世弼)은 1516(중종 11)년 모친 봉양을 위해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며, 그 이후 시독관(侍講官)이 되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진강(進講)하였다. 또한 ‘염결선치인(廉潔善治人)’으로 뽑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여기서 1519(중종 14)년은 김세필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데, 그해에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사림파(士林派)의 왕도정치(王道政治)가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세필(金世弼)은 1473(성종 4)년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판서(判書)에 추증된 김훈(金薰)과 군수(郡守)를 역임한 진천송씨(鎭川宋氏)의 후손으로서 군수(郡守)를 역임한 송학(宋翯)의 딸 사이에 차남(次男)으로 탄생(誕生)했다.그러나 김세필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인데 사실상 그의 공식적인 행적(行跡)은 18세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구체적으로 김세필이 18세에 성종(成宗)이 친림(親臨)해 제생(諸生)을 시험할 때 급제(及第)했다는 것인데, 왕이 그가 가장 연소한 사실을 알고 글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적(世界的)인 거장(巨匠)이었으며 화가로서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科學者), 발명가(發明家), 건축가(建築家)로서도 탁월한 재능(才能)을 발휘하였다. 그는 1452(문종 2)년 이탈리아 피렌체 빈치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1519(중종 14)년 프랑스 중부지역에 위치한 앙부아즈성에서 향년(享年) 68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1519(중종 14)년은 조선시대(朝鮮時代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은 기존의 임명에서 면허를 인가받는 것으로 변화되었는데 그러한 사례를 박승석(朴勝錫)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1913년 3월 8일부로 박승석이 종두인허원으로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시대(大韓帝國時代)에 종두의양성소(種痘醫養成所)에서 과정을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었던 종두인허원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와서는 조선총독부의 감독(監督)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
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도시숲이 맑은 공기를 제공할 뿐 아니라 미세먼지 저감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도시숲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주요도시의 도시숲은 턱없이 부족하다.우리나라 전체 1인당 생활권 도시숲 면적은 2021년 기준 11.48㎡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기준인 9㎡를 넘어선 상태이긴 하다. 하지만 수도권 등 대도시를 살펴보면 사정이 다르다. 서울의 경우 1인당 도시숲 면적은 불과 4.97㎡밖에 안 되며 전국 17개 시·도 중 꼴찌를 달린다.그외 경기도(8.84㎡), 인천
박희제 언론인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 현장의 고통스런 모습이 SNS와 TV 영상을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날 것의 영상’들이 진실을 전달하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면서 전쟁과 갈등이 사라지도록 하는데 얼마나 기여할까? 대중들이 비극적 영상을 보고 슬퍼하고, 아픔을 공유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데 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며칠 전 경기 가평에서 3만여 명이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 행사에 우연히 참석해 상념에 젖다 보니 필자 또한 그런 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跡)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이 생겼으니, 그것은 2009년 1월에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어느 전문가(專門家)의 도움으로 2009년 1월 12일에 박승석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4월 14일자 기사(記事)에 게재가 된 것을 확인했다.그런데 여기에 나온 기사에서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이 최초로 등장하였으니 필자가 종두인허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기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와 관련
전경우 칼럼니스트‘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다. 쓸쓸하면서도 정다운, 나그네 걸어가는 풍경이 펼쳐지고, 술처럼 가슴이 익어 훈훈해지는, 명작이다. 우리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부르고 읊었을 민요 한 자락 같은, 정다운 시다. 눈물 속에서도 술 빚어 위안 삼을 줄 알았던 소박하고 정겨웠던 시절의 풍광이 되살아나고, 소나기 쏟아지자 훅 밀려오는 흙냄새처럼 토속의 향기가 느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역사(歷史)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종두인허원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과정을 언급하고 본격적으로 그 역사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우두(牛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있었던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구체적으로 당시 집안의 재당숙(在堂叔)으로부터 “너의 증조부(曾祖父)가 방골에서 우두(牛痘)를 놓으셨다”는 증언을 들은 것이 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跡)을 알게 된 최초의 단서였다.흔히 우두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전경우 칼럼니스트온통 선거 이야기다. 방송 채널마다 선거를 놓고 말들이 많다.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 미디어들도 마찬가지다. 이 당은 어떻고 저 당은 또 어떻고, 어느 당이 옳고 어느 당이 그른지, 누가 쓸 만한지 누가 쓸데없는 인간인지, 무수히 말들이 오간다. 세상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꼴들이 방송에서 신문에서 우리들 밥상머리에서,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다.화개장터에는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다’고 했는데, 이 정치판에는 ‘있어야 할 건 없고, 없어야 할 건 있다’. 참으로 기이하고 무섭고, 우습다. 염치고 나발이고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연천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는 동면 현사리를 비롯해 옥산리 오미, 내대리, 당후, 좌찬리, 율동, 와초리원우, 세류동, 상수리, 사대동, 가척리, 지사의 군민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 율동에 거주하던 박승석(朴勝錫)도 50전을 의연(義捐)한 기사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7(융희 1)년 8월 7일자 기사에서 확인된 것이다.그 이외에 서면 소포리, 관인면 중리, 북면의 군민들도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또한 1906(광무 10)년 신정균(申鼎均)과 박동빈(朴東彬)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일신의숙에서도 교
전경우 칼럼니스트‘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영영’ ‘사랑’ ‘홍시’… 그 많은 지하철역 이름을 단숨에 읊어 대던 ‘수다맨’도 나훈아의 노래들은 다 못 외울 것이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던 아득한 시절부터 반백년이 더 지나도록 우리들을 웃기고 울렸던 나훈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음악으로, 몸으로, 정신과 말로 다 증명해 보였다.경상도 “싸나이”였던 나훈아는 본명이 최홍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을 냈고, 음반과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도 엄청나다. 노래의 황제, 가황(歌
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동아예술전문학교 예술학부 교수)영화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을 통해 한국형 오컬트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장재현 감독이 이번에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영화 ‘파묘’를 공개했다.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이 영화는 전작인 ‘검은 사제들’보다 파면 팔수록 뭔가가 더 나오는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지고, ‘사바하’보다 대중적인 색채로 무장돼 있다. ‘파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루고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도입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승석(朴勝錫)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알려진 유일한 사실은 본래 생부(生父)는 박기양(朴沂陽)이나 박도양(朴道陽)의 아들로 출계(出系)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박도양이 세상을 떠난 이후 박승석이 탄생한 것으로 볼 때 사후양자(死後養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정확히 언제 출계하였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사실 오랜 세월 박승석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유년기(幼年期)부터 중년기(中年期)에 이르는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는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어 본보(本報)에 최초로 공개한다.필자는 그동안 1907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승석(朴勝錫)은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으로서 연천에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했다는 것인데 어떤 계기에 의해 두창(痘瘡)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이제 종두인허원으로서 연천에서 우두(牛痘)를 시술했던 박승석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박승석의 자(字)는 여삼(汝三)이요, 본관은 반남(潘南)으로서 선조(宣祖) 대의 문신(文臣)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친교가 두터웠던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11대손으로 18
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최근 읽은 브라질 작가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연금술사가 주인공에게 이전 두 번의 약탈을 당한 것을 근거로 추가적인 시련을 예언하면서 전한 말이다. 스포츠에선 다른 어느 분야보다 이 말이 실감 난다.김우민에 이어 황선우까지 금빛 역영을 펼치면서 한국 수영은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단일 대회 최고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까지 세계수영선수권대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어렸을 때 학습만화에서 머리가 희고 헝클어진 아저씨를 보았다. 바로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인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다고 전제하였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이가 달리는 기차 안에 있다면 바깥에 있는 것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고, 이때 다른 사람이 기차 밖에서 시계를 보면 서로의 시간이 다르게 가게 되며 둘의 시간 모두가 맞다고 하였다. 즉, 시간의 동시(同時)는 누구에게나 같은 것이 아니라 관측자에 따라 바뀌는 것으로, 동시성의 불일치란 개념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다.‘만화 캐릭터’
설중매(雪中梅)한임동연붉은 송이송이터질 듯 꽃봉오리눈 속에 매화 피었네 함박눈 속에고개들고 피어나는 매화눈 속에 피었으니벌 나비 알지 못하고 찬 바람눈 속에서도 매화는희고 고운 여인같이맑고 지조 높은 아름다움이여 그대 눈 속에서도굽히지 않는 군자의 자태이니고결한 선비 같은 매화여매화 사랑은 봄이 오기 전부터시인의 마음이었네 약력 시인서울문학 편집위원한국문인협회 회원해동서예학회 초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