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정과(正果)는 과일이나 연근, 생강, 도라지, 감초 같은 약초를 조청이나 꿀에 졸인 한과다.‘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정과는 이름 난 나무열매와 아름다운 풀 열매를 꿀에 달여서 볶은 것으로, 가히 오래 두어도 되나니 중국에서는 밀전과(蜜煎果)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정과라 한다. 즙청까지 아울러 쓰는 것은 수정과라고 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궁에서 잔치 때 주로 연근·생강·산사육·동아·모과·도라지 등을 이용해 정과를 만들었고, 제례 시에는 특히 인삼정과를 올렸다.‘경국대전(經國大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산수(傘壽)를 향해 가는 필자로서는 보리밥 하면 떠오르는 것이 보릿고개와 함께 보리쌀 바구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선반 위에 얹어 둔 삶은 보리쌀 바구니를 향해 어머니 몰래 간다. 보리쌀은 한 번 삶아서 밥을 하면 퍼지지 않아서 먹기 힘들다. 그래서 곱삶는다고 해서 한번 삶은 보리쌀을 재차 솥에 안치고 물을 다시 부어 밥을 한다. 이 삶은 보리쌀을 한 주먹씩 쥐어 입에 넣으면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어머니에게 혼날 줄 알면서도 부엌을 들락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으레 “오늘
‘과거의 일이 옳은지 그른지도 알지 못하고서야(旣往之是非不能知), 현재의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則目前之是非何得知也).’ 고산 윤선도 선생의 말이다.역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형돼 ‘현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 통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말의 논지는 과거를 바로 알아야 현재를 알고, 현재 봉착하고 있는 당면 현안에 대한 지혜 있는 대책이 마련된다는 뜻으로 새겨지고 있다. 여당이 경선을 거치는 과정에서 대선주자들의 치고받기 판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요즈음 코로나19 때문에 주당들은 대부분 ‘혼술’을 한다고 한다.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어울려 한잔하며 정의를 나누던 시절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주점들은 폐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며칠 전 종로1가에 있는 소머리 국밥집을 갔다가 굳게 문이 닫히고 주변이 폐허처럼 변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안 좋았다. 이 국밥집은 입구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밤새 뼈를 고아 국밥을 만들었던 식당으로 언론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이렇듯 서민들이 이용하는 음식점들이 먼저 문을 닫고 있다. 손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학문이 있다. 모든 것이 필요하기에 존재할 것이다. 오죽하면 공자는 논어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였던가. 또 안중근 의사는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 했던가. 나아가 고산 윤선도 선생은 유배생활 중에서도 ‘락서재(樂書齋)’라는 글방을 만들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기쁜 마음으로 학문 익히기를 즐겨하지 않았던가.그런데 필자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때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고 말이다. 하루 간에 먹는 양식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약용은 조선후기 대학자로서 실학을 집대성했는데, 1762년(영조 38)생이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나고 243년 이후에 출생했다.1800년(정조 24) 6월 28일 향년 49세를 일기(一期)로 정조가 의문의 승하를 하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 들었는데 그 이듬해에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사암(俟菴)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나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3대 저서를 비롯해 5
고산죽권천학갖고 싶었네보길도 같은 익명의 섬 하나쯤나대지로 누워 있는 빈터묵밭 일궈낼 내연의 섬 하나쯤찬바람만 들이치는네 생애의 깎아지른 해안그 끝없는 기다림을 붙들어 맬심지 푸른 사내 하나쯤숨어서도 곧은 고산죽 한 그루가꾸고 싶었네[시평]‘고산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조선조의 시인 윤선도(尹善道)를 대나무와 결합해 만든 조어(造語)가 아닌가 생각된다. 윤선도의 호가 고산(孤山)이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고산 윤선도가 만년에 들어가 살았다는 보길도(甫吉島)와 함께, ‘외로운 산’, 그 고산(孤山)에서
땅끝 마을 해남에서 남도 뱃길 따라 1시간여 가다보면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섬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은 조선중기 문인이자 정치가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가 정치와 세상을 뒤로하고 보길도 부용동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곳으로 유명하다. 정치적 암흑기라 불리던 조선 중기, 당파와 당쟁으로 인해 부패와 타락이 만연했고, 또 당시 남인의 수장으로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고산은 그 실망감에 낙향해 자연과 벗하며 못다 이룬 정치적 꿈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며 이상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런 그의 고독하고 고
최상현 주필 거울은 사람의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사람을 거울로 쓴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왜 사람은 거울을 보는가.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그런 목적이라면 우리가 당면한 시대상과 국가
최상현 주필 예송(禮訟)은 궁중 전례에 대한 싸움이다.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서인 남인이 싸웠다. 조선 18대 현종 왕 때의 일이다. 왕가에서 초상이 났을 때 복상(服喪) 기간이 얼마여야 하느냐를 가지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현종 재위 15년 동안(1659-1674) 두 차례 예송 싸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진으로 재위 내내 국론은 분열되고 국정은 차질을 빚었다. 백성들은 이 시기에 가뭄과 홍수 재해와 역병으로 숱하게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 시체를 치우느라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공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소모적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