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서정주(1915~2000)복사꽃 피고뱀이 눈 뜨고초록 제비 묻혀오는 하늬바람 위에혼령 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아무 병도 없으면서가시내야, 슬픈 일 좀,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시평]봄은 만물이 새롭게 눈을 뜨는 계절이다. 차가운 땅속에 죽은 듯이 묻혀있던 식물들도 새싹을 돋아 올리고, 검게 죽은 듯했던 나뭇가지들도 싹들을 파랗게 피우는, 그래서 온 천지에 꽃들이 피어나고, 웅크린 채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던 뱀들도 똬리를 풀며, 게슴츠레 눈을 뜨는, 멀리 강남으로 날아갔던 제비들도 초록빛의 남쪽 기운을 몰고 돌아와, 지지배
식목일 노래유치환(1908~1967)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벌거벗은 붉은 산에 살 수 없어 갔다오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시평]지금은 거의 불리지 않는, 어쩜 잊힌 ‘식목일 노래’다. 우리가 어린 시절 50년대,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식목일이 있는 4월이면 학교에서 어김없이 아동들이 합창으로 부르며 산으로 가서 나무를 심곤 했었다. 그렇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온통 벌거숭이 민
사월의 노래박목월(1915 - 1978)목련꽃 그늘 아래서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구름꽃 피는 언덕에서피리를 부노라아 아 멀리 떠나와이름 없는 항구에서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시평]4월이다. 모든 생명이 새롭게 돋아나는 사월이다. 4월이 오면, 이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 박목월 선생의 ‘사월의 노래’가 떠오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작곡가 김순애 선생의 작곡으로 더욱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또 애창되는 가곡 ‘사월의 노래’.목월 선생은 유독 독일의 문호 괴테의 ‘젊은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1964~)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시평]새로움을 맞이하게 될 때, 마음이 설레고, 가슴은 두근거린다. 마음이 설레지 않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새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새로움이 되지를 못한다. 어쩌면 설렘과 두근거림이 세상을 새로움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봄이란 계절은 사시(四時)의 순환에 따라, 그 시기, 그때가 되면 늘 찾아오는 계
삼월에 오는 눈 나태주(1945~ )눈이라도 3월에 오는 눈은오면서 물이 되는 눈이다어린 가지에눈물이 되어 젖는 눈이다이제 늬들 차례야잘 자라거라 잘 자라거라물이 되며 속삭이는 눈이다. [시평]3월도 이제 하순경에 이르렀다. 완연한 봄 날씨가 이어진다. 밝게 떨어지는 햇살은 따듯하며, 살갗을 어루만지듯 불어오는 바람은 훈훈하다 못해 감미롭다.그러나 때때로 변덕을 부려, 추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기도 하고, 한겨울 마냥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3월에 내리는 눈은 한 겨울에 내리는 눈 마냥, 내리면서 꽁꽁 언 얼음이 되지를 않는다
우리의 봄은윤석산(1947~ )역신(疫神)에게 아내를 빼앗기고면구스럽게 돌아서는처용마냥우리의 봄은 그렇게 왔다. 민낯의 서울 광화문 광장은 오늘도낯익은 군중들로 붐비고 밀가루 반죽으로 버무려진 듯이것도 저것도 아닌 널브러진 세상.그러나 저마다의 소리로 저마다의함성 터뜨리는 세상 그래 촛불도, 태극기도모두 아랑곳하지 않고봄날은 그렇게 우리의 곁 훌쩍 찾아왔다. [시평]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우리의 곁을 찾아왔다. 내가 중학교에 막 입학하던 1960년의 봄날에는 4.19가 일어났다. 그해 이후 우리의 봄날은 늘 데모대와 함께 최루탄으로
봄비 지나간 자리박형준(1966~ )봄비는간질이는 손가락을 갖고 있나?대지가 풋사랑에 빠진 것 같다꽃보다 먼저 물방울이나무의 몸을 열고 있다물방울마다 가득무지개가 돌고 있다공원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그 속에 방울방울 떠다닌다 [시평]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다는 춘분(春分)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같다는 사실 이외에, 춘분은 지금까지 우주를 뒤덮었던 음(陰)의 기운이 양(陽)의 기운으로 바뀌는, 그런 분기점이기도 하다. 춘분을 기점으로 하여 우주를 비롯한 이 대지는 따듯한 양(陽)의 기운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하늘과 땅은 양기에
조등弔燈신현정(1948~2009)감나무 가장이에 높다랗게 달린 홍시같이해 뜨는 곳과 해 저무는 곳이 한 꼭지에 모인 빛깔,방금 문밖에 내걸렸다 [시평]지금은 보기가 힘든 광경이지만, 예전에는 집에 상사(喪事)가 나면, 대문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어놓았다. 빨간 불빛의 등이었다. 붉고 은은한 불빛이 왠지 침울한 분위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는 상중(喪中)’입니다. 하며 슬픈 눈빛을 보낸다.이런 조등을 높은 가지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연시(軟柹)에 시인은 비유를 한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간당간당 매달린 까치밥은, 높이
설날오탁번(1943~2023)설날 차례 지내고음복 한 잔 하면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막내 손 시릴까 봐아득한 저승의 숨결로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시평]엊그제 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정월 초하루인 설날과 한식(寒食), 그리고 단오(端午), 추석을 큰 명절로 삼았다. 그래서 이날들에 선조님께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객지에 가 있던 가족들이 이날은 각기 집으로 모여들어, 제를 올리고 가족 간의 우의를 다지곤 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설날과 추석에만 선조
제주국제공항 388서안나죽음을 밟지 않고 제주에 착륙할 수 없다 제주국제공항 비행장은4.3 때 최대 학살터2007년 388구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역사의 평탄화 작업이 끝난 제주공항학살의 무늬를 따라 달려가는 활주로주검이 먼저 이륙한다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제주를 떠날 수 없다 [시평]1947년에서 1954년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진 남로당과 토벌대의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 등에서 수많은 제주 주민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에 좌익 세력이 시
폭설공광규(1960~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시평]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한밤중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려, 산이며, 들이며, 사람들이 나다니는 거리며, 상점이며, 동네며,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어슬녘에 시작한 술자리가, 그치지 않는 눈을 핑계 삼아 2차로, 또 3차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거나하게 취하여 눈길을 밟으며 돌아온다. 궁극적으로는 술을
파도강은교(1945~ ) 모래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바닷가나는 보았습니다파도들이 달려올 때는 옆 파도와 단단히어깨동무한다는 것을손에 쥔 하얀 거품이모래밭을 덮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온몸을 하얀 거품 손에 감춘다는 것을파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시평]바닷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마치 수많은 파도가 서로 어깨를 걸머지고, 아니면 손에 손을 잡고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몰려와서는, 해변의 흰 모래밭을 뒤덮고는 온몸을 나뒹굴듯, 부스러져 버리고 만다.파도도 저렇듯 해변을 향해 달려올 때면, 서로가 서로를 껴안듯이
대설안도현(1961~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방 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시평]눈이 많은 계절이다. 소설(小雪)이니 대설(大雪)이니 하는 절기(節氣)의 이름을 붙여 이 시기를 부른다. 그러나 눈이 많이 내리면 오히려 그 겨울은 따듯하다고 한다. 눈이 내리면 날이 누그러지고 그래서 푸근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겨울을
엔딩 크레딧권태완너를 보내고 잘했다 매듭지었다못 한 말 꾹꾹 눌렀다보고 싶어 비안개 필 때는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다저 혼자 큰 호랑가시나무제 가슴을 찌르며 산다공지천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그리움은 죽음보다 오래 남을까 완전 실패 우리가 제작한 인디영화텅 빈 극장의 엔딩 크레딧네 얼굴 안고 어둠 속에서 둥실 떠오른다. [시평]엔딩 크레딧이란 영화가 끝나고 검은 화면 위로 제작자들의 명단이 아래에서 위로 서서히 올라가면서 나열되는 자막을 말한다. 이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영화관에 앉아 있었던 일이 있었다. 제작자가 누구고, 감독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황진이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시평]옛시조에는 본래 제목이 없다. 그래서 첫 행을 그 제목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 되었다. 황진이의 이 시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고 긴 겨울, 동지(冬至) 밤을 이야기하면, 어찌 황진이의 이 시조를 거론하지 않으리오. 길고 긴 겨울밤을 연연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견디며, 그 사랑과 그리움을 의연하면서도 또 절절하게 노래한 절창 중의 절창의 시조이다.황진이는 그 뛰어난 상
사랑하는 사람아강우식(1941 ~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저녁답이면마른 솔가지 한단을 져다놓고그대 아궁이에 불을 쑤시고 싶었다저 세찬 새벽 눈발이 잘 깨까지…… [시평]강우식 시인의 언어는 매우 육감적이다. 연연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육감적인 면을 떨칠 수가 없다. 허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장 엄숙한 증거가 ‘성욕’이라는 논리를 펴는 시인이니 어디 그렇지 않겠는가. ‘성욕’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증거이고, 만약 ‘성욕’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살아 있으되 살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강우식 시인의 논리이다
낮은음자리표유우영자세를 한껏 낮추고소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풀꽃화려한 들풀에 가려져죽을 둥 살 둥 하루하루를 견디다가한줌 햇볕에 기대어 요동을 치더니뽀송한 솜털 일으켜 환하게 꽃 피운다세상이 환하다[시평]어쩌면 우리네 삶이 그런지도 모른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란, 엄연하고 팍팍한 현실에 가려서 자신의 자세를 한껏 낮추고, 소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풀꽃과도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정치인, 유명연예인, 직장의 상사,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들인 아들과 딸들에 가려서, 자신이 자신인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감이 우리의 모습인
서쪽의 시간한혜영(1954~)첨탑에 저 붉은 해는 어느 닭의 볏입니까날개를 갖지 못해우러러만 보는 횃대하늘엔 걷잡을 길 없는 불길이 번집니다. 노을을 등에 업고 절룩이며 돌아오는퉁퉁 부어오른 하루의 발등 위에내 오래 참아온 회개 향유처럼 붓습니다. [시평]해가 뉘엿뉘엿 지는 서쪽 하늘로는 붉은 노을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하루의, 아니 한 생애의 그 마지막 시간이 스러지는 그 모습, 실로 장엄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길고 긴 여정을 지나와 맞이하는 저녁놀. 그러나 그 저녁놀은 날개를 갖지 못해, 나르지 못하는 닭
이팝나무 아래서김밝은저만치서 머뭇거리는 봄을 불러보려고꼭 다물었던 입술을 뗐던 것인데그만,울컥 쏟아낸 이름고소한 밥 냄새로 찾아오는 걸까시간의 조각들이 꽃처럼 팡팡 터지면기억을 뚫고 파고드는 할머니 목소리악아, 내 새끼밥은 묵고 댕기나 [시평]이팝나무는 그 꽃이 쌀밥을 닮았다고 하여 ‘이팝’, 곧 쌀밥나무라고 부른다. ‘이팝’은 ‘이밥’의 속음이라고 한다. 이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라는 의미로, 벼슬이나 해야 이씨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쌀밥을 먹을 수가 있어, 쌀밥을 이밥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5월에서 6월에 꽃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1033 ~ 1997)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시평]박재삼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