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가 독자참여코너로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연재합니다. 낱말 퀴즈는 가로세로 낱말퍼즐 저자로 잘 알려진 김수웅 선생이 직접 출제한 퀴즈가 격주로 게재됩니다. 퀴즈에 응모하는 독자 중 5분을 추첨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1.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 ~으로 대들면 어찌 하면 좋겠소?3. 사명당을 높여 이르는 말. 밀양에 있는 표충사는 ~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6.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과 절을 함께 쓸 수 있다8. 서기 38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세필(金世弼)은 1520(중종 15)년 3월 명나라에서 사신(使臣)의 임무(任務)를 마치고 귀국하였으며 4월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된 지 1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그런데 그해 9월에 김세필이 특진관(特進官)으로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중종(中宗)에게 진언(進言)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는데 당시의 정황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한 김세필의 신도비를 인용한다.“전하(殿下)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접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당우(唐虞)의 치도(治道)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세필(金世弼)은 1473(성종 4)년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판서(判書)에 추증된 김훈(金薰)과 군수(郡守)를 역임한 진천송씨(鎭川宋氏)의 후손으로서 군수(郡守)를 역임한 송학(宋翯)의 딸 사이에 차남(次男)으로 탄생(誕生)했다.그러나 김세필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인데 사실상 그의 공식적인 행적(行跡)은 18세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구체적으로 김세필이 18세에 성종(成宗)이 친림(親臨)해 제생(諸生)을 시험할 때 급제(及第)했다는 것인데, 왕이 그가 가장 연소한 사실을 알고 글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적(世界的)인 거장(巨匠)이었으며 화가로서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科學者), 발명가(發明家), 건축가(建築家)로서도 탁월한 재능(才能)을 발휘하였다. 그는 1452(문종 2)년 이탈리아 피렌체 빈치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1519(중종 14)년 프랑스 중부지역에 위치한 앙부아즈성에서 향년(享年) 68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1519(중종 14)년은 조선시대(朝鮮時代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갈빗살을 다져서 양념한 후 갈비뼈에 얹어 구운 요리를 떡갈비라고 한다.고기를 다져 떡처럼 모양을 만들어 숯에 구워 먹는 음식. 궁중에서 왕이 즐겨 먹던 가리구이식의 음식이 원형으로, 지역에 유배된 양반들이 먹기 위해 조리법이 전해오던 것을 각 지방 특색에 맞게 발전한 것이 현재의 떡갈비 형태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일설에 전라도 지방에는 610여년 전 담양에 유배된 사대부가 떡갈비를 전하였고, 경기 지방에는 1910년을 전후하여 궁궐에서 방출된 나인들이 떡갈비를 전하였다고 한다.송정 떡갈비는 1950년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역사(歷史)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종두인허원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과정을 언급하고 본격적으로 그 역사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우두(牛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있었던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구체적으로 당시 집안의 재당숙(在堂叔)으로부터 “너의 증조부(曾祖父)가 방골에서 우두(牛痘)를 놓으셨다”는 증언을 들은 것이 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跡)을 알게 된 최초의 단서였다.흔히 우두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히말라야산맥에 있는 부탄은 인구가 75만명밖에 안 된다. 우리나라 고양특례시 인구도 안 되는 작은 나라다. 그런데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평을 얻고 있다.한국의 한 여행자가 부탄을 다녀온 후 쓴 기행문을 보면 이들의 행복지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탄 사람들은 삶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살아가는 듯 보인다. 여행자가 갑자기 사진기를 들이대도 웃음으로 대한다. 금전적 가치가 그들의 행복의 조건이 아닌 듯하다’부탄에는 국가행복연구소라는 기관이 있다. 이곳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옛날에는 전라남도 장흥 정도는 가야 매생이 맛을 보았는데, 요즘은 마트에 가면 녹색 매생이 덩이가 종종 눈에 띈다.매생이는 갈파래목의 해조류로 깨끗한 곳에서 자라며 매산(苺山)이 접미어 ‘이(伊)’가 붙어 ‘매산이’ 음운변화를 거쳐 ‘매생이’가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맷생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생 이끼라는 뜻으로 생긴 모습과 질감이 마치 이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매생이는 섬유질이 촘촘해서 보온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녹색 매생이와 두부, 굴을 넣은 매생이국이나 매생이죽은 겨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목민심서(牧民心書)는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저술한 여러 저서(著書)중에서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는데, 사암(俟菴)은 목민심서 48권을 강진읍에서 조금 떨어진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서문(序文)에서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요, ‘심서(心書)’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구체적인 구성과 내용은 그가 직접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다음과 같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후기(朝鮮後期) 실학(實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3대 저서를 포함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著書)를 후세(後世)에 남겼다.여기서 정약용의 호(號) 사암과 관련해 언급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그의 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다산(茶山) 이외에 삼미자(三眉子),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 탁옹(籜翁), 열초(洌樵), 균암(筠菴) 등이 있었으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자수점필(智水掂筆)’의 저자(著者) 홍한주(洪翰周)의 생존연대(生存年代)는 1798(정조 22)~1868(고종 5)년으로서 5대조부를 비롯해 윤치정(尹致定), 조병구(趙秉龜)와 동시대 인물(同時代人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字)는 헌경(憲卿)이며, 호(號)는 해옹(海翁)을 비롯해 해사(海士), 지수(智水), 쌍송만사(雙松漫士), 총계당(叢桂堂) 등이 있다.홍한주는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시작으로 의성 현감(義城縣監),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천 부사(利川府使), 상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광해군(光海君)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이 1610(광해 2)년에 완성됐는데 동의보감이 광해군 시대에 편찬됐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국왕(國王)으로서 백성들의 건강문제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본다.그렇다면 광해군이 허준이 유배(流配) 중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 편찬을 계속할 수 있게 배려한 동의보감이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 의해 완성된 것인지 살펴본다.동의보감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염병(傳染病)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삼국 중 가장 문화가 발전했던 백제의 멸망은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마지막 의자왕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고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기벌포에 상륙할 때까지 왕도 사비가 무너지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부여는 그리 높지 않은 부소산 남록에 형성된 도시다. 사방을 백마강이 에워싸고 있지만 동쪽 능사가 있는 동쪽이 취약하다. 이곳에 긴 나성을 쌓았지만 신라군 5만 대군을 막기에는 너무 취약했다.그래서 충신 성충은 동쪽 탄현을 지칭하며 백제군이 절대 넘지 못하도록 간언한다. 그러나 의자왕은 공연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유희춘(柳希春)은 마침내 1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流配生活)을 마치고 다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면서 성균관 직강 겸 지제교(成均館直講兼知製敎)에 제수(除授)되었으니 다시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게 되었다.그 이후 대사성(大司成)을 비롯해 부제학(副提學),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의 요직(要職)을 거쳐 1575(선조 8)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그런데 유희춘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을 한 이후 1577(선조 10)년 서울에서 향년(享年) 6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허준(許浚)의 자(字)는 청원(淸源)이며 본관(本貫)은 양천(陽川)으로 1539(중종 34)년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재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역임했던 허론(許碖)과 영광김씨(靈光金氏) 사이에 장남으로 탄생하였다.이와 관련해 본래 양천은 고구려 때에는 재차파의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으로 고쳤다가 1310(충선왕 2)년에 다시 양천현으로 개칭되었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1895(고종 32)년에 양천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14년에 경기도 김포군에 편입되기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391(공양왕 2)년 6월에 이색(李穡)이 다시 함창으로 폄척(貶斥)되었다가 12월에 소환(召還)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封)해지고, 공신(功臣)의 호(號)는 전과 같았다.또한 그해 겨울에 또 함창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데, 문인 권근(權近) 또한 충주(忠州)로 폄척되어 가다가 길에서 이색을 만나 앞서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고하니, 이색이 이르기를 “이것은 속이는 짓이다. 신하의 도리는 오직 임금의 명령대로 따라서 부르면 오고 물리치면 떠나야 한다. 죽음도 피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한 이래 34대 공양왕(恭讓王)까지 475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지하던 고려왕조(高麗王朝)가 1392(공양왕 4)년 7월 17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어느덧 고려왕조가 멸망(滅亡)한지 6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필자가 본 칼럼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생애(生涯)를 쓰게 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사실 그동안 이색의 생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오래전 한산이씨대종회(韓山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가 1695(숙종 21)년 2월 5일 파주(坡州) 만성정(晩醒亭)에서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생애(生涯)를 마친 이후 1698(숙종 24)년 우의정(右議政) 최석정(崔錫鼎)의 건의(建議)에 의해 문순(文純)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는데, 문(文)’은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이 높음을 뜻하는 것이고‘순(純)’은 중도(中道)에 맞고 올바르고 화목하고 순수함을 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편 박세채가 세상을 떠난 지 69년이 되는 1764(영조 40)년 5월 28일 마침내 문묘(文廟)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한 지 5년이 된 1694(숙종 20)년에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니 이를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한다. 덧붙이면 숙종 대에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비롯하여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을 통하여 당시 정국(政局)이 얼마나 격동적(激動的)으로 전개되었는지 여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갑술환국(甲戌換局)은 박세채(朴世采)가 생애(生涯)를 마치기 1년 전인 1694(숙종 2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1689(숙종 15)년에 발생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89(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는 숙종(肅宗)이 장희빈(張禧嬪)의 소생(所生)인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冊封)하려다가 서인(西人)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를 강행하였다는 점에 있다.이러한 와중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유배(流配)되어 사사(賜死)된 것을 비롯하여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퇴우(退憂) 김수흥(金壽興)도 유배(流配)되거나 사사(賜死)되었다.그런데 이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