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통통 털어서 다줬어 /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 명월이 하고 살아서 왕서방 기분이 좋구나 / 우리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지난 60년대 상영된 ‘비단이 장사 왕서방’이란 영화의 주제가다. ‘띵호와’란 무슨 뜻일까. ‘가장 좋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顶好’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이 노래가 유행하여 필자도 어린 시절 즐겁게 따라 부른 적이 있다.6.25 전후 시장통에서 대부분 중국 음식점을 한 화교들은 열심히 살았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은 기존의 임명에서 면허를 인가받는 것으로 변화되었는데 그러한 사례를 박승석(朴勝錫)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1913년 3월 8일부로 박승석이 종두인허원으로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한제국 시대(大韓帝國時代)에 종두의양성소(種痘醫養成所)에서 과정을 이수하면 취득할 수 있었던 종두인허원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와서는 조선총독부의 감독(監督)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연천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는 동면 현사리를 비롯해 옥산리 오미, 내대리, 당후, 좌찬리, 율동, 와초리원우, 세류동, 상수리, 사대동, 가척리, 지사의 군민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 율동에 거주하던 박승석(朴勝錫)도 50전을 의연(義捐)한 기사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7(융희 1)년 8월 7일자 기사에서 확인된 것이다.그 이외에 서면 소포리, 관인면 중리, 북면의 군민들도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또한 1906(광무 10)년 신정균(申鼎均)과 박동빈(朴東彬)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일신의숙에서도 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승석(朴勝錫)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알려진 유일한 사실은 본래 생부(生父)는 박기양(朴沂陽)이나 박도양(朴道陽)의 아들로 출계(出系)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박도양이 세상을 떠난 이후 박승석이 탄생한 것으로 볼 때 사후양자(死後養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정확히 언제 출계하였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사실 오랜 세월 박승석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유년기(幼年期)부터 중년기(中年期)에 이르는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는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어 본보(本報)에 최초로 공개한다.필자는 그동안 1907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승석(朴勝錫)은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으로서 연천에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했다는 것인데 어떤 계기에 의해 두창(痘瘡)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이제 종두인허원으로서 연천에서 우두(牛痘)를 시술했던 박승석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박승석의 자(字)는 여삼(汝三)이요, 본관은 반남(潘南)으로서 선조(宣祖) 대의 문신(文臣)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친교가 두터웠던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11대손으로 18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자수점필(智水掂筆)’의 저자(著者) 홍한주(洪翰周)의 생존연대(生存年代)는 1798(정조 22)~1868(고종 5)년으로서 5대조부를 비롯해 윤치정(尹致定), 조병구(趙秉龜)와 동시대 인물(同時代人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字)는 헌경(憲卿)이며, 호(號)는 해옹(海翁)을 비롯해 해사(海士), 지수(智水), 쌍송만사(雙松漫士), 총계당(叢桂堂) 등이 있다.홍한주는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시작으로 의성 현감(義城縣監),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천 부사(利川府使), 상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맵고 단 맛이 나는 나물이라는 신감채(辛甘菜)를 승검초라고도 부른다. 학명은 ‘Ostericum grosseserratum’. 묏미나리속은 과거 당귀속(Angelica)에 포함돼 있다가 독립했다. 속명 ‘Ostericum’은 그리스어 ‘hysterikos’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서양에선 이 속의 식물이 히스테리를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신감채의 중국명은 다치산친(大齿山芹)이다. ‘큰 결각이 있는 멧미나리(묏미나리)’라는 의미인 듯한데, 별칭이 많다. 그중에는 조선당귀(朝鲜当归), 조선독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현재 서울에서는 북한의 인권을 촉구하고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개선하기 위한 자유와 민주의 북한자유주간이 진행 중에 있다. 이 행사 뒤에 탈북민 단체들이 혹시 대북전단을 뿌릴까 걱정이 되는지 통일부가 국내 탈북단체에게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중단해 달라고 촉구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후보자 시절부터 ‘표현의 자유’와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강조하며 대북전단 살포를 법률로 규제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번에 발표된 통일부의 입장은 다소 결이 달라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대북전단은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게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청나라 건륭제의 여름별장 ‘열하’를 사신의 종사관으로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일기를 쓰면서 당시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비록 군사력으로 조선을 강점했으나 청국의 문화가 낮은 것을 폄하한 것이다.연회석에서 주고받은 화답 시에 ‘일월(日月=明)’이란 글자마저 꺼리는 중국 사대부들 앞에서 조선의 젊은 외교사절들은 수준 높은 학문을 가지고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당시 청나라는 주변 제후국 가운데 조선의 사신들을 최고로 대우해 줬고, 좋은 숙소를 배정했으며 항상 제1번 순위로 황제를 만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조(正祖)는 1794(정조 18)년에 화성축조(華城築造) 청사진(靑寫眞)을 발표했는데, 10년에 걸친 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왕권을 충분히 강화시킨 후에 화성이 완공됨과 동시에 아들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서 화성행궁(華城行宮)에 거쳐할 예정이었다.그런데 이러한 계획이 그 시기가 대폭 앞당겨졌으니 구체적으로 1796(정조 20)년에 화성 공사가 완공된 것이었는데 결정적인 요인은 정약용(丁若鏞)이 발명한 거중기(起重機)로 인한 것이었는데 그 경위를 자세히 살펴본다.정조는 1792(정조 16)년 정약용이 부친상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소주(蘇州)의 소(蘇)를 파자하면 ‘艹’+‘魚’+‘禾’가 된다. 따뜻한 기온, 풍부한 수량, 비옥한 토지 덕분에 초목이 무성하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며 벼농사가 잘된다. 살기에 가장 좋다는 자랑이기도 하지만, 잠자리는 불편했을 것이다. 주택이 대부분 2층 또는 3층인 것은 습도가 높아서 1층에서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소주(蘇州)가 유명해진 것은 풍부한 물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인이 만든 경이로운 토목사업인 운하 때문일 것이다. 이 운하는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양제는 이 지역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아차산(阿且山)은 서울의 대표적 산성 유적이자 명산이다. 강북은 물론 강남인들도 즐겨 찾는 등산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산을 경계로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가 나뉘어져 있다.정상에서 용마산으로 오르면서 고구려 보루가 조사돼 여러 해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뜻 밖에 고구려식의 축성 방법을 알게 됐고 모두 17개에 달하는 보루는 독특한 형식의 구조임이 파악되기도 했다.아차산에서 찾아진 명문기와는 이 산의 비밀을 풀어줬다. 바로 ‘한산(漢山)’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였다. 한
포천시장 박 윤 국포천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많은 관광자원으로 유명한 도시다. 물을 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처럼 '포천(抱川)'은 한탄강을 품고 있다. 한탄강은 최근 관광 트렌드로 급부상한 생태관광의 최적지라고 말할 수 있다.한탄강은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해 140㎞를 흐르는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이다. 이 중 남한 한탄강 유역은 86㎞에 달하며 포천시를 흐르는 한탄강은 40㎞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한탄강은 내륙에서 보기 힘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선캄브리아시대부터 신생대에 이르기까지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약용(丁若鏞)이 을묘박해에 연루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된 사실을 11회에서 소개했는데 을묘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사암이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살펴본다.사암은 1794년(정조 18) 정조의 어명에 의해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적성,마전,연천,삭녕 지역에 대한 감찰 임무를 수행한 이후 동년 12월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도청랑(都廳郞)으로 제수됐으며,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가 됐다가 그 이듬해 정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 되었으니 사암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많은 성곽(城廓)을 새로 쌓거나 수축했다. 이런 국가적 공역이 7세기 후반 문무왕(文武王) 시기에 이뤄진다. 왜 전쟁이 사라진 시기에 성을 더욱 튼튼히 한 것일까.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도 이 시기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뤄졌다. 남한강에서 조령으로 통하는 충주 남산성의 축성도 삼국통일 직후 이뤄졌다. 남산성은 중원경 주민들의 보민성으로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신라 성들은 백제 성곽들에 비해 특별히 견고했다. 백제 땅 예산 임존성이나 연산 황산성, 서천 건지산성 등은 견고하지만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792년(정조 16) 4월 정약용(丁若鏞)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진주목사로 재임 중에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사암(俟菴)은 형제들과 함께 5월에 관을 모시고 와 충주 하담 선영에 장사지내고 마현의 가묘(家廟)에 혼백(魂魄)을 모셨다.정조는 사암이 부친상으로 3년 시묘생활(侍墓生活)을 하는 과정에서 자주 안부를 물어 보면서 사암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보여 주었는데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그런데 이 해 겨울에 수원에 성을 쌓는데 임금이 말씀하시기기를“기유년(1789년) 겨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762년(영조 38) 마재에서 출생한 정약용(丁若鏞)은 불과 4세라는 어린 연령에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6세에 연천현감으로 부임하는 정재원을 따라서 관사에서 생활하였는데, 7세에 ‘산(山)’이라는 제하의 제목으로 직접 시를 지을 정도였으니 이는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여기서 사암이 불과 7세라는 어린 연령에 직접 지은 시 ‘산’의 전문을 소개한다.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거리가 멀고 가까워서 다르기 때문이다
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도발로 점철됐던 2017년이 저물어가고 새해 2018년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북한은 사거리 1000㎞의 스커드-ER부터 미국 동부 지역 타격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모든 종류의 미사일을 쏘아 올렸으며 새해 1월 1일 신년사 발표를 앞두고 군수공업대회와 세포위원장 대회 등을 개최하며 내부 재정비와 진로 변경에 고민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2일(현지시간) 북한 유류 공급을 대폭 줄이고 해외에 근무하는 북한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임진전쟁 당시 조선군대의 총수는 30만이 넘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숫자다. 그런데도 부산에 상륙한 일본 선발대 1만 8천여명의 고니시 군대를 막지 못했다. 병력은 많았으나 이들을 한 곳에 규합할 수 없었으며, 부산을 지킨 육군은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상대가 안됐다.정규군은 대부분 괴멸되거나 도주했다. 동래성을 끝까지 지킨 것은 문신(文臣) 부사 송상현과 백성들이었다. 일본장수가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웠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비켜라(戰則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