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법적으로 공용화한 것은 459년 후인 대한제국 고종 9년(광무) 1905년이었다. 고종황제는 칙명을 통해 모든 관공서의 공문이나 서식을 한글로 쓰라고 명을 내렸다.언문이라고 비하해 안방 여인들의 내간으로만 사용하던 한글이 제대로 국문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우리글이면서 역대 임금들의 유시나 선비들의 상소, 저서에 한글 쓰기를 꺼려 했다.그런데 첫 한글 공용 이후 조선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비분강개한 충정공 민영환공의 자결이었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세종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운동 부족에다 평소 육식을 좋아한 탓에 살이 쪄 태종이 걱정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년에 당뇨로 고생했는데 시력저하로 신하들의 얼굴마저 잘 알아보지 못했다. 세종 비 소헌왕후는 2살 연상이었다. 13세에 충녕대군(세종)과 혼인했으며 신랑은 11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세종은 누나 같은 소헌왕후에게 많이 의지했던 모양이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평생 금실이 좋았다고 하며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소헌왕후를 공손하다하여 공비(恭妃)라고 불렀는데 시아버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은 유교적(儒敎的) 가치관(價値觀)을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생활 속에는 불교신앙(佛敎信仰)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종(太宗)도 늙어서는 불교에 귀의(歸依)하였고, 태종의 후궁(後宮)인 의빈 권씨(宜嬪權氏)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또한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도 한때 불교에 귀의하였으므로 세종과 불교의 인연은 깊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 1443(세종 25)년 세종은 효령대군의 청(請)을 받아들여 흥천사(興天寺)에 사리탑을 완성하고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이러한 세종의 불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세종(世宗)이 1446(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한 이후 공식 문서로서 의금부(義禁府)와 승정원(承政院)에서 실제 적용하였으며, 언문청(諺文廳)을 열어서 태조(太祖)의 사적(事跡)을 ‘용비의 시(詩)’에 보충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해 ‘용비(龍飛)의 시’가 이미 작성이 되었으나 우리 글로 정리할 때, 그 부족한 부분을 직접 태조실록(太祖實錄)의 기록에서 뽑아 보충하려고 할 때, 언문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춘추관(春秋館)에서는 “실록이란 사관 아닌 사람은 볼 수 없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미복(微服) 잠행’이란 임금이 평민 의상을 입고 바깥세상을 시찰하는 것을 지칭한 말이다. 구중궁궐에 갇혀 살던 임금들도 때로는 자유롭게 거리를 구경하고 백성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고구려 산상왕의 부인은 미망인인 형수였다. 형수의 도움으로 왕위를 얻은 산상왕은 그녀의 질투심으로 다른 왕비를 얻지 못했다. 왕은 어느 날 제사에 쓸 돼지가 궁을 빠져나가자 이를 뒤쫓았는데 주통촌에 다다른다. 주통촌은 색주가로 술과 여자가 있는 곳이었다. 산상왕은 궁중을 빠져나가 여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인가. 그는 주통촌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면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었다. 하나는 중전 소헌왕후였고 둘째 딸 정의공주다. 저명한 한글학자 전 고려대 정광교수도 이 점은 인정하고 있다. 궁궐안의 여인들이 한글의 일부를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2년 전 청주 초정약수를 다녀왔다. 실록을 보면 두 번이나 다녀 왔는데 초정에서 묵은 날은 모두 121일이나 됐다. 그런데 초정 행차에는 소헌왕후를 대동했다. 총명한 정의공주를 데리고 갔다는 기록은 없다. 정의공주는 이미 출가한 몸이었으므로 동행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아비방연’이란 창극을 봤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호송을 책임진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극의 줄거리는 아비 왕방연이 사랑하는 딸 소사를 지키기 위해 한명회 편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게 된다는 얘기다.단종을 지킨 충신 김종서를 축출한 계유정난에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까지의 궁중 암투와 권모술수를 시종 슬픈 우리 소리로 암울하게 펼쳐나간다.수양대군은 원로 공신과 충신들을 살육하면서 ‘적폐를 청산해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권력탈취의 정
수암 김동영천만리 머나만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애달프다.이 시조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 유배지 청룡포에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그의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청령포를 굽어보는 서강(西江)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연군(戀君)의 단장곡(斷腸曲)이다.그는 참혹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신 ‘단종’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절절이 표현하면서, 동시에 부도덕화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어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최고의 화원 안견이 안평대군(1418~1453)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이다.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풍모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안평은 이 그림을 하명하면서 앞으로 닥쳐올 참변을 예견하고 도원에서 살기를 염원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그림은 아쉽게도 일본 천리대에 소장돼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린 그림은 모사본이다.안평대군은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둘째 형 수양대군에 저항하다 36세에 죽은 불운의 왕자였다. 청지라는 자(子.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임금 세종.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훈민정음은 대표적인 업적이다. 유네스코는 한글이 세계 많은 글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당대 많은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글 창제를 밀어붙인 세종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종은 동궁시절부터 글을 좋아했다. 한번 책을 잡으면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평소 과식과 운동 부족이었을까. 세자는 몸이 비대해진다. 아버지 태종도 아들의 비만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젊은 시절에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을 찾았다. 이화장은 1945년 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거주한 곳이다. 공사 중이라서 집 앞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만 보았다. 동상 아래에 새겨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새삼스럽다.원래 이화장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이었다. 그런데 1490년에 성종은 이 집을 사들여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탁영 김일손(1464∼1498)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있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때문이다. 사육신이 충절의 아이콘이 된 것은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55년 윤6월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김시습은 단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학사상의 핵심인 왕도정치의 붕괴였다. 주공이 되겠노라고 한 수양대군의 언행은 거짓이었다. 통곡 끝에 그는 책을 불살랐다. 현기증을 느끼고 똥통에 빠졌다.1456년
최상현 주필 하늘에 오른 용을 항룡(亢龍)이라 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출세와 입신의 극치에 오른 사람들, 바로 제왕들을 항룡이라 불렀다. 하늘 꼭대기에 오르면 언젠가는 다시 내려와야 한다. 땅에서 태어난 생명들은 공중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것이 섭리로 정해진 이치이며 예외는 없다. 구만리 장천(長天)을 나는 신천옹(albatross)일지라도 먹고 자고 쉬고 짝 짓는 일을 공중에서 할 수는 없다. 애초의 출발지인 땅으로 돌아와 발을 딛고 날개를 접고서야 그런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주역(周易)에서는 항룡유회(亢龍有悔), 즉 ‘하늘
최상현 주필 옛날 사람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떠올리는 것은 세상의 불의를 나무라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의한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는 나라의 어른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에서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같은 꼿꼿한 어른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의와 혼란을 질타할 공정한 역할자도 없다. 김시습은 길을 가다가 사인교에 몸을 비스듬히 젖혀 기대어 안하무인으로 오만하게 행차하는 고관대작의 앞을 가로막고서 큰 소리로 혼내주는 것 정도는 예사였다. 심지어는 짜증이 나도록 오래 벼슬자리에 붙어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