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국밥은 국말이·장국밥·탕반 등으로 부른다. 1800년대 말 에 탕반에 대하여 “좋은 백미를 깨끗이 씻어서 밥을 잘 짓고, 무를 넣어 잘 끓인 장국에 나물을 갖추어 만들어 국에 만다. 밥을 국에 말아 나물을 갖추어 얹고 약산적을 위에 얹어 후춧가루와 고춧가루를 뿌린다”라고 하였다.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던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의 에 ‘장갱(醬羹)’ 즉 장국이 등장한다.조선 후기 문신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안국(金安國)은 1519(중종 14)년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직(罷職)되어 고향인 경기도 여주군 주촌에 은거(隱居)하면서 이곳에 소재(小齋)를 건립하여 현판(懸板)을 ‘은일(隱逸)’이라 칭하고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면서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전념하였다.그 이후 18년이 지난 1537(중종 32)년 다시 등용(登用)되어 상호군 겸동지성균관사(上護軍兼同知成均館事)를 시작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참찬(左參贊), 대제학(大提學), 찬성(贊成), 판중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안국(金安國)은 1510(중종 5)년 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에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올랐다. 1511(중종 6)년에 일본 사신(日本使臣) 중 붕중(棚中)이 내방(來訪)하여 김안국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붕중을 예(禮)로 접대하여 체면을 얻었고 또 수창(酬唱)한 시가 많아서 풍부하고 민첩하기가 끝이 없었다.붕중(弸中)은 크게 감탄하여 말하기를 “제가 이웃나라에 내방한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는데, 공(公)만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라고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본 칼럼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수제자(首弟子)로서 개혁정책(改革政策)을 추진했으며,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라는 영예로운 벼슬을 역임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생애(生涯)를 고찰(考察)한다.의성김문(義城金門)이 배출한 김안국은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의학(醫學)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본격적으로 모재의 생애를 소개한다.김안국은 고려시대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역임한 김용필(金龍弼)의 10대손으로서 고조부(高祖父)는 우왕 대에 함흥소윤(咸興少尹)을 역임한 김
우리 민족은 태초부터 그 어떤 민족 못지않게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 사연은 기쁨과 환희보다 아픔과 치욕이란 글자를 떠올리게 하는 그야말로 아픈 역사다.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프고 치욕스런 역사가 바로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굴욕이니 조선의 종말이다.이 세상엔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섭리요,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국민 곧 선민이 부패하면 매국으로 이어지고, 부패는 결국 외세 침탈이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뿐만 아니라 이 같은 멸망은 다시 자유와 독립이라는 회복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니 그야말로 섭리 중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361(공민왕 10)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승여(乘輿)가 몽진(蒙塵)을 하게 됐는데, 신료(臣僚)들이 허둥지둥해 대부분이 무너져 흩어졌으나 이색(李穡)은 왕을 호종해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호위헸을 뿐 아니라 지병부사(知兵部事)가 되어서 군국대사(軍國大事)에 참가했다.그래서 마침내 1363(공민왕 12)년 2월에 이색은 왕을 호종해 송도로 귀환했으며, 윤3월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의 칭호 증서를 왕이 하사하고 도형벽상(圖形壁上)의 은전(恩典)으로 논과 밭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세에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혼례(婚禮)를 치른 이색(李穡)은 그 이듬해에 원나라에 유학을 떠나니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당시 원나라에는 그의 부친 이곡(李穀)이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재임 중이었는데, 베이징에 도착한 목은은 원나라의 국립대학(國立大學)이라 할 수 있는 벽옹(辟雍)에 입학했다.덧붙이면 벽옹은 중국 주나라 때 천자(天子)가 도성에 건립한 대학으로서 주위의 형상이 벽과 같이 둥글고 물이 둘러 있었다고 하여서 그 명칭을 벽옹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58세의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와 15세의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의 연령 차이가 43세가 되는데 사찰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사실 자체가 이례적인 일로 판단된다.물론 이런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여기서 사찰명(寺刹名)과 관련해 단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나 남계집(南溪集)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볼 때 현재의 보광사(普光寺)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덧붙이면 1688(숙종 14)년 당시 박세채의 처소(處所)는 파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남계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필자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정규적인 탁아소와 유치원을 거쳐 북한의 고도성장기인 1960년대 전 기간에 초, 중학교를 다녔다. 북한에서는 이 세대들이 신분 상승 문제로 “왜 우리 할아버지는 일본 경찰서에 돌멩이라도 집어 던져 유리창이라도 깨지 않았는가?” 또 “왜 우리 아버지는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는데 전사하지 않았는가?” 이런 말을 농담조로 던진다. 이른바 노동당 시대에 ‘백두산 줄기’와 ‘낙동강 줄기’가 출세하는 데 따른 동경 반, 시기 반의 농담이다. 필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탕평론(蕩平論)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박세채는 당쟁(黨爭)이 심화(深化)되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특히 당쟁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러한 배경에서 남계(南溪)가 주장한 것이 바로 탕평론이라 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 탕평론은 한마디로 당쟁으로 인한 폐단(弊端)이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당시에 이러한 주장을 한 인물은 박세채가 최초(最初)라 할 수 있다.여기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가 끝났다. 한미동맹 7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에 한국 대통령의 방문이라 미국 측은 각별히 예우하고 세심히 배려한 것 같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환대를 받은 것은 마땅히 기뻐할 일이다. 대통령실과 일부 매체는 환대를 받은 것을 넘어 성과도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꼼꼼히, 그리고 냉철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우선 안보 분야에서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미국에게서 진전된 확약을 얻어낼 것인지가 관심사였는데 이른바 ‘워싱턴 선언’은 기존의 핵우산 및 확장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39(인조 17)년 9세에 남원에서 서울로 다시 온 박세채(朴世采)는 11세에 부친(父親)인 박의(朴漪)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우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집(文集) 등을 읽었다. 그런데 박세채가 14세가 되는 1644(인조 22)년 박의(朴漪)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구체적으로 박세채는 이미 숙부(叔父)인 박유(朴濰)의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으나 그의 친형(親兄)인 박세래(朴世來)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형 대신 다시 돌아와 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본 칼럼에 소개하는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17세기 조선(朝鮮)의 관인(官人), 유자(儒者)로서 숙종(肅宗) 대(代)에 당파(黨派)를 초월(超越)하여 능력(能力)에 따라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하자는 탕평론(蕩平論)을 최초(最初)로 주장(主張)하였다.박세채는 1695(숙종 21)년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생애(生涯)를 12회에 걸쳐서 소개(紹介)한다.박세채의 본관(本貫)은 반남(潘南)이며, 자(字)는 화숙(和叔)으로서 1631(인조 9)년 한성부(漢城府) 서부(西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산수(傘壽)를 향해 가는 필자로서는 보리밥 하면 떠오르는 것이 보릿고개와 함께 보리쌀 바구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선반 위에 얹어 둔 삶은 보리쌀 바구니를 향해 어머니 몰래 간다. 보리쌀은 한 번 삶아서 밥을 하면 퍼지지 않아서 먹기 힘들다. 그래서 곱삶는다고 해서 한번 삶은 보리쌀을 재차 솥에 안치고 물을 다시 부어 밥을 한다. 이 삶은 보리쌀을 한 주먹씩 쥐어 입에 넣으면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어머니에게 혼날 줄 알면서도 부엌을 들락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으레 “오늘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콩잎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1285(충렬왕 11)년에 불승(佛僧) 일연(一然)이 지은 5권 3책의 역사책 ‘삼국유사(三國遺事)’ 제3권 탑상 제4편에는 ‘신라 승려 조신이 콩잎이나 명아주국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 후에 지은 ‘고운집(孤雲集)’에 ‘관곡(館穀)을 후하게 지급해 여곽(藜藿)의 식사를 탄식하지 않게 하시고, 매양 궤손(簋飧)의 대접을 받게 하며 그저 염매(鹽梅)의 맛을 포식하게 했으니, 이는 모두
송병승 충효예문화운동본부 공동총재 충신(忠臣)은 충성(忠誠)을 다하는 신하다. 충성은 나라, 임금에게 바치는 곧고 지극한 마음이다. 간사한 신하인 간신(奸臣), 임금에게 반역한 신하인 역신(逆臣)이 득세하면 나라는 위기에 직면한다. 우리는 충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충신이 걸어간 길을 따르며 애국애족하는 자유민주주의 충효예 문화시민이 되자고 주창한다. 우선 충신 황현(黃玹, 1855~1910)은 본관이 장수(長水)로 호는 매천(梅泉)이다.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이요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 황희(黃喜, 1363~145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지난 8월 중순 미국에서 인플레감축법이 발효됨으로써 앞으로 수입 전기차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그 충격이 상당하다. 민주당이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해 의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고 곧바로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이 이루어진 탓인지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연합과 일본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해 대응하지 못했는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가 대표단을 보내 미 측과 협의를 시작했다고 하나 미국의 국내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우리 측 요구가 가까운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퇴계 이황(1501∽1570)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1천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청백리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이황은 1551년(명종 6)에 청백리에 뽑혔다. 퇴계(退溪)는 항상 물러나고자 했다.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 이후 병약(病弱)을 구실삼아 관직을 사퇴했다. 1546년에 그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바위 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열중했다. 이때 실개천 토계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목민관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은 거창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실천 하나가 백성들에게 감동을 준다.이런 선비가 청백리 기건(奇虔?~1460)이다.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靑坡 서울시 청파동)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그는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대학, 중용’ 등을 외우곤 했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됐다.일찍이 황해도 연안(延安) 군수가 됐는데, 군민(郡民)들이 군수에게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기건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는 1684(숙종 10)년 윤선거(尹宣擧) 묘갈명(墓碣名)과 관련해 일어난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갈등이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확대됐을 때,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주장해 양측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됐다.숙종(肅宗) 초기 유배(流配)된 이후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을 옹호했다.1689(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에 이르러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野人生活)을 했으니 이 무렵이 학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