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매년 8월 15일은 광복절로 국경일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해 패망함으로써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광복절을 기념하는데 올해는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한지 78년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 구 소련의 야욕과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분단국가로 남아있다.광복이란 명예롭게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강제적으로 식민지로 변한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박세채(朴世采)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탕평론(蕩平論)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박세채는 당쟁(黨爭)이 심화(深化)되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특히 당쟁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러한 배경에서 남계(南溪)가 주장한 것이 바로 탕평론이라 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 탕평론은 한마디로 당쟁으로 인한 폐단(弊端)이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당시에 이러한 주장을 한 인물은 박세채가 최초(最初)라 할 수 있다.여기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어느 나라이건 기억하고 싶은 역사가 있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역사가 있다. 잊고 싶은 역사는 무엇이고 기억해야 할 역사는 어떤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피로 지켜준 위대한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함께 지켜야 하는 든든한 우방이기도 하다. 6.25라는 참담한 비극을 통해 잿더미가 된 한국을 오늘날 번영을 이루게 한 힘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한때 우리 사회에선 용미(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본 칼럼에 소개하는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17세기 조선(朝鮮)의 관인(官人), 유자(儒者)로서 숙종(肅宗) 대(代)에 당파(黨派)를 초월(超越)하여 능력(能力)에 따라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하자는 탕평론(蕩平論)을 최초(最初)로 주장(主張)하였다.박세채는 1695(숙종 21)년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생애(生涯)를 12회에 걸쳐서 소개(紹介)한다.박세채의 본관(本貫)은 반남(潘南)이며, 자(字)는 화숙(和叔)으로서 1631(인조 9)년 한성부(漢城府) 서부(西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하자는 척화파(斥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니 새로운 차원의 당쟁에 돌입하게 되었다.그러나 결국 인조(仁祖)가 척화파(斥和派)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돌변해 청태종(淸太宗)이 1636(인조 14)년 12월 2일 직접 군사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신호탄(信號彈)이 시작되었다.한편 청나라의 이런 기습적인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국왕들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 영조(英祖)였는데 52년동안 재위(在位)하였으며, 향년(享年) 83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했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42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승하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정조(正祖)가 동궁(東宮) 시절 여러차례에 걸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영조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결국 왕위를 계승하였듯이 인열왕후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한편 인열왕후가 승하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198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충북도문화재위원이었을 때 청주시 북이면에 있는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 후손들이 묘소를 도문화재로 지정해달라는 민원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으로 척화론에 맞서 화의를 주장한 인물이다.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 행궁에서 한편은 화의를 해야 한다고 하고 한편은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다. 항복문서를 작성한 최명길, 이를 어전에서 찢은 김상헌의 눈물겨운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리얼하게 재현되기도 했다.최명길의 묘소는 당대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러한 역사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12년은 소현세자(昭顯世子) 탄생 400주년이었는데, 브레이크뉴스에 “병자호란과 소현세자의 역사적 교훈 잊지 말자” 제하의 칼럼을 기고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대를 앞서갔으나 그 웅장한 포부를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생애를 재조명한다.소현세자는 1612(광해 4)년 한성부 회현방 사저(私邸)에서 인조(당시는 능양군)와 인열왕후(仁烈王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조선군의 저항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홍타이지 자신이 조선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금적금왕(擒敵金王)이었다.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라는 생각에는 그를 따라 참전한 강홍립의 조언도 기여했을 것이다. 병자호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의 포위와 광교산의 일전, 강화도에서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홍타이지의 금적금왕계가 주효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전국적 규모의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1648(인조 26)년 모친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상을 당하여 부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와 관련해 상복을 벗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어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결국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부임하기에 이르렀다. 석호(石湖)는 동래부사로 재임 중에 학교를 수리하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고 충렬사(忠烈祠)를 중건하였으며 또한 보역청을 설치하여 군병의 요역을 면제하고 포승의 훈련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특히 조총의 사정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이도록 개조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636(인조 14)년 8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朝廷)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대립됐다. 석호(石湖)의 부친 윤황(尹煌)은 척화의 주창자(主唱者)였으며 그 또한 척화를 주장하는 계차(啓箚)를 올렸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 이후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결국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문거는 병자호란 때 부친을 따라 어가(御駕)를 호종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해인 1623(인조 1)년에 평창이문(平昌李門)의 후손으로서 선교랑(宣敎郞)의 품계(品階)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李瑑)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로부터 4년 이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였다. 정묘호란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전주곡(前奏曲)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후금(後金)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당시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신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강화도에서 협상을 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2022년은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알려졌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백부(伯父)가 되는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의 서세(逝世) 350주년이 된다. 그동안 다양한 인물의 생애를 칼럼을 통하여 소개하였는데 본 칼럼을 통하여 윤문거의 생애를 소개하는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 윤문거는 1606(선조 39)년에 탄생하였는데 그 생애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석호가 탄생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 윤문거가 탄생한 1606(선조 39)년은 조선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한지 14년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이윽고 명나라가 참전해 국제전쟁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5월 하순에 충남 논산의 파평 윤씨 유적을 답사했다. 윤여갑 씨의 안내로 맨 먼저 간 곳은 종학당(宗學堂)이다. 종학당은 파평 윤씨 문중 서당으로 1627년에 인평대군 사부 윤순거(尹舜擧)가 세웠다.이어서 윤황 고택과 묘소를 찾았다. 대사간 윤황은 우계 성혼에게 배웠는데 성혼의 사위가 됐다. 그는 8형제(적출 5명, 서출 3명 속칭 팔거)를 낳았다. 창녕성씨 부인이 낳은 다섯 아들이 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다음은 유봉영당(酉峰影堂)이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지난 주말 영국에서 있었던 EPL 토트넘 마지막 경기에서 아시아 최초로 득점왕에 오른 손흥민 선수의 감동이 일주일째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이집트 출신 선수 살라(리버플)와 공동 득점왕이 됐지만 PK 하나 없는 손흥민에게 세계 언론은 더 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윤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지만 우리 국민에게 무한한 기쁨과 희망을 준 쾌거였다. 첫 EPL 득점왕은 한국 축구사상 최고의 영예로 기록될 것이다.필자는 축구 매니아로 손흥민 출전 경기가 있으면 늦은 시간에도 꼭 보고 잔다. 5~7만이 운집한 경기장에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인조(仁祖)의 이러한 교서(敎書)가 귀국길에 오른 청 사신의 조선인(朝鮮人) 통역관(通譯官)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사건이 확대일로(擴大一路)의 양상(樣相)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통역관을 통하여 이 교서를 전달받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는 귀국한 이후 이러한 상황을 청태종(淸太宗)에게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인조의 교서를 읽은 청태종은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전쟁을 할 바에야 조선이 대응을 하기 전에 신속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속도전(速度戰)을 결행(決行)했다. 청태종이 마침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31(인조 9)년 인조(仁祖)가 승지(承旨) 강홍중(姜弘重)을 통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조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경기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소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이원익은 1634(인조 12)년 1월 29일 향년(享年) 88세를 일기(一期)로 90 평생의 생애를 마쳤는데 청렴(淸廉)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인해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전주로 피난한 상황에서 후금(後金)이 강화 의사를 밝히자 조선(朝鮮)도 이를 수용하였다.이에 따라 조선은 후금과 형제(兄弟)의 맹약(盟約)을 맺는 대신에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고 양국 사이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하기로 하는 등의 화약(和約)이 체결(締結)되었다.그래서 그 결과 조선은 후금과의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었으며 후금과의 강화 조약(講和條約) 이후에도 명나라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그러나 일단 전쟁을 종식하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