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이 순식간에 공중화장실이 됐다. 세종대로 거리에는 쓰레기가 100t 가량 쌓였다. 하지만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봤다. 민주노총이 16~17일 서울 도심인 세종대로 일대를 점거하고 벌인 1박 2일간 불법집회 현장의 모습이다. 이 바람에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민주노총 건설노조는 16일 오후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덕수궁 앞까지 세종대로 왕복 8개 차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는 퇴근시간대까지 이어지면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원래 오후 5시 이후의 집회는 불허됐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막무가내로 강
천지일보가 독자참여코너로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연재합니다. 낱말 퀴즈는 가로세로 낱말퍼즐 저자로 잘 알려진 김수웅 선생이 직접 출제한 퀴즈가 격주로 게재됩니다. 퀴즈에 응모하는 독자 중 5분을 추첨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증정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야구에서, 오른쪽 타자가 1루 쪽으로 살짝 밀어 대는 번트 3. 9월 21일은 癡呆克服의 날/ 알츠하이머병 Alzheimer病 6. 권세나 정권을 잡음. □□여당. □□세력. 장기□□을 하다 8. 억울한 일이나 잘못된 일, 딱한 사정 따위를 말함 10. 정치를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고종황제(高宗皇帝) 망명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으니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식혜를 마신 이후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괴로워하다가 30분 만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회영(李會榮)이 추진했던 고종황제의 베이징(北京) 망명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국내 체류 6년 만에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니 1919년 2월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회영이 거처하였던 곳은 베이징 자금성 북쪽 후고루원에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5년 3월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해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류동열(柳東說), 이춘일(李春日), 유홍렬(劉鴻烈)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영국조계 서북천로 학숙에 모여 조직기구, 임원선출을 완료하고 규칙과 취지서를 작성하면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했다.신한혁명당의 조직은 본부와 지부로 구성됐는데 본부는 베이징 서단패루 김자순(金子淳)의 집에 설치하였으며, 본부장(本部長)에 이상설이 추대됐다.지부는 우선 중국에서는 상하이(上海), 한구(漢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특사단(特使團)은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석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성(不當性)을 호소하지 못하게 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 구체적으로 일제의 침략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앞서는 국제현실에 대한 분노,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에 대한 절망감, 특사로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책감을 느꼈다.그런데 특사단 중 한명인 이준(李儁) 특사가 현지에서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통분의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장렬하게 순국(殉國)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로 일제는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자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가 돼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에 별세했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61세에 딸을 본 고종은 사는 맛이 났다.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가 이육을 낳았고,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가 이우를 낳았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더욱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7월에는 이우가 죽었다.이 시기 다섯살 덕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8월 29일에 한국은 일제에 강점됐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도 황실은 ‘한일 병합조약’ 제3조에 의거 예우를 받고 세비(歲費)도 받았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됐지만 대접을 받았다. 10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특별회계 세출예산 외에 이왕가(李王家)의 세비 금(金) 50만원(圓)을 지출했다(순종실록 부록 1910년 10월 10일).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이왕가에게 지급한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150만엔(현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최근에 새로운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김응집(金應集)을 알게 됐는데, 본 칼럼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독립운동가를 발견하게 된 것인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5회에 걸쳐서 연재한다.거슬러 올라가서 1992년 종조부(從祖父) 박의서(朴義緖)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사한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돼 독립운동가 발굴 활동을 해 총 10인의 독립유공자 신청서(獨立有功者申請書)를 보훈처에 제출해 그중에서 2인이 독립유공자로 추서(追敍)된 경력을 가지고 있다.2021년은 의친왕(義親王)의 7남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 추진하였던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베이징(北京) 망명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권회복(國權回復)을 향한 고종황제의 항일의지(抗日意志)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의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파견이었다.거슬러 올라가서 1907(융희 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특사가 고종황제의 밀명(密命)에 의하여 헤이그로 파견되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호소하려다가 소기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뮤지컬로 더 유명해진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한 민왕후(1851∽1895)의 시호이다. 그런데 왕후의 시호는 여러 번 바뀌었다.1895년 10월 15일에 고종은 왕후의 승하를 반포했다. “8월 2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 경복궁 건천궁 왕비의 침실)에서 승하했다.”10월 19일에 왕후의 시체를 재궁(梓宮)에 넣었고, 10월 22일에는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를 순경(純敬)으로,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했다.여담이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의친왕(義親王)의 6개국 순방과 관련하여 ‘마지막 황실의 추억’ 제하의 책 194쪽을 인용한다.“‘고종실록’의 이 기사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이 생긴다. 어머니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5일 만에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라고 고종황제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는 ‘답례 방문’이라고 했는데 무엇에 대한 답례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아버지의 유럽 순방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1896(건양 1)년 의친왕은 일본으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고종황제(高宗皇帝)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義親王)과 김란사(金蘭史)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던 계획은 뜻밖에 고종황제가 붕어(崩御)하면서 난관(難關)에 봉착했으나 김란사는 고종황제의 유지(遺旨)를 받드는 의미에서라도 거사는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는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손정도(孫貞道)를 만나러 베이징(北京)으로 출발했다.그러나 손정도가 베이징(北京) 합달문내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하였기 때문에 약속이 연기되었으며 동포가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돼 19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고종황제(高宗皇帝)는 1918년 6월 미국유학시절 의친왕(義親王)과 웨슬레안 대학 동문이었던 김란사(金蘭史)를 의친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극비리에 특사로 파견해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됐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본다.고종황제가 덕수궁(德壽宮) 주변의 모든 민가들을 철거하였지만 유독 정동교회(貞洞敎會) 목사관(牧師館) 만큼은 철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특사 파견 결정 후에 이 특사들을 파리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손정도(孫貞道),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고종황제(高宗皇帝) 망명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에 뜻밖의 돌발변수가 등장했으니 고종황제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식혜를 마신 이후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괴로워하다가 30분 만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고종황제가 붕어하기 이전에 이회영(李會榮)을 중심으로 고종황제 망명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망명계획과 병행하여 또 하나의 거사가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고종황제가 1907년(융희 1) 헤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15년 3월 상해 영국조계 서북천로 학숙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외교부장에 성낙형(成樂馨)을 임명한 것을 비롯해 교통부장 유동열(柳東說), 재무부장 이춘일(李春日), 감독 박은식(朴殷植), 상해 지부장 신규식(申圭植), 장춘 지부장 이동휘(李東輝), 연길 지부장 이동춘(李同春), 회령 지부장 박정래(朴定來), 나남 지부장 강재후(姜載厚)를 임명했다.이상과 같이 당(黨) 조직은 완료됐으나 당수(黨首) 결정이란 문제가 남았는데 신한혁명당의 주도세력들은 장차 동맹관계를 맺게 될 중국과 독일이 모두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07년(융희 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파견된 세 특사의 활동자금은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내탕금(內帑金)에서 2만원이 지원됐으며, 블라디보스톡에서 김학만(金學滿)과 정순만(鄭淳萬)이 한인들로부터 모금해 1만 8천원을 전달했다.세 특사는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마침내 1907년(융희 1)6월 24,25일경 헤이그에 도착했으며, 헐버트 박사는 특사들과 동행하지 않고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파리를 거쳐 비슷한 날짜를 전후하여 헤이그에 도착했다.이와 관련해 특사들은 헤이그에 도착해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고종황제(高宗皇帝)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된 이후에도 여러모로 은밀한 외교를 전개해 각국 원수에게 일제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호소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융희 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고종황제는 특사 파견을 결정했다.이와 관련해 만국평화회의는 각국의 군비확장을 제한하고 전쟁 방지를 목적으로 이미 1899년(광무 3)에 제1차 회의가 열린 바 있었다.1907년(융희 1)에 개최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춘생문(春生門) 사건에 이어서 두 번째로 추진됐던 사건이 1896년(건양 1)에 발생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는데 여기에 관여한 핵심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생모였던 엄귀비(嚴貴妃)인데 아관파천이 어떤 사건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엄귀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생애를 소개한다.엄귀비는 1854년(철종 5) 서울에서 엄진삼(嚴鎭三)의 2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했는데 8세 때 입궁해 궁녀가 됐으며, 명성왕후(明成王后)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지밀상궁(至密尙宮)까지 이르렀으며,
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경복궁에 그려져 있는 용은 발가락이 네 개인데, 덕수궁의 용은 발가락이 다섯이다.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발가락이 다섯, 조선의 왕을 의미하는 용은 발가락이 네 개였기 때문에 경복궁의 용은 발가락이 네 개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덕수궁의 용이 발가락 다섯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찻잔이나 그릇을 만들 때에도 중국 황제가 쓰던 것은 발가락 다섯 달린 용의 형상을 넣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임금의 것이라도 용 발가락 네 개 달린 것이어야 했다.임금이 입는 옷을 곤룡포(袞龍袍), 혹
오얏꽃신경희덕수궁 석조전문양으로 깊이 새겨진 대한제국의 꽃황제의 나라대한제국에서피다가 만 꽃덕혜옹주를 닮았다. [시평]덕수궁은 슬픔과 아픔이 많이 깃든 궁궐이다.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거처하며 사용돼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이 됐다. 19세기 침략을 앞세운 열강(列强)에 의해 어려움을 겪던 시대, 민비(閔妃)가 시해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해 간 사건인 아관파천(俄館播遷), 그리고 러시아공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