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엊그제 120여 년 역사가 사라질 뻔한 초등학교에서 뜻깊은 민관협의회가 열렸다. 필자를 포함해 참석자가 20명 정도의 소규모 회의였으나 ‘교육여건 개선을 위한 소통회의’라는 다소 거창한 명칭이 붙었다. 회의 장소는 인천 최초 공립학교인 창영초교 문화재관 사랑채. 일자형 적벽돌 2층에 아치형 현관문, 격자형 창틀, 나무 복도 등 근세 풍모를 간직한 건물이다.창영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들이 1919년 3월 6일 전화선을 끊고 동맹휴교를 선언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현재 교정 안에는 ‘3.1
국립이천호국원 현충과 박종일다가오는 3월 1일은 3∙1운동 99주년을 기념하는 3∙1절이다. 3∙1운동은 일제에 항거해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우리 민중들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독립운동이다.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했으며, 마침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공포해 국권을 침탈했다. 이후 헌병 경찰을 통한 강압적인 무단 통
최상현 주필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逵)는 이렇게 읊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동방규가 흉노의 왕과 정략결혼을 위해 홍안의 볼에 눈물지으며 고국을 떠난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의 궁녀이며 미인인 왕소군(王昭君)을 그리며 지은 시다. 봄이 봄 같지 않은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 같다. 이 땅에 어김없이 꽃 피고 새 우는 봄은 찾아와 양광(陽光)이 완연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동토(凍土)’ 그대로다.